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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개성공단 2021. 7. 18. 15:38

1. 배경

지난 번에 소개한 7년 전쟁

영국 프로이센의 편으로 참가하여 

전쟁에서 승리한다

영국은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가 아메리카에 보유한 식민지 일부분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갑자기 넓어진 식민지는 제대로 통치하기도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과의 충돌은 당연했다

또한 7년 전쟁에서 쓴 막대한 자금 때문에

앞으로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한 유지 비용

영국 정부는 파산에 이르렀고

 

그들은 자신이 가진 식민지를 이용해

어느 정도의 돈을 메꾸기로 결정하는데...?

 

 

2. 13개 식민지

13개 식민지 신대륙 발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시작한 끝에

정착을 반복하며, 많은 영토를 불린

북아메리카 동부에 위치한 식민지였다

2대, 3대를 거쳐가며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조금씩 얕아지고 있던 식민지인들

그들은 프렌치-인디언 전쟁(7년전쟁) 때도

영국과 연대하며 싸웠던 그들이였지만

정작 그 전쟁이 끝나면서

양자간의 갈등이 촉발되기 시작했다

 

 

3. 거둘만큼 거두자

영국의 제8대 총리로

조지 그렌빌 내각이 등장했다

 

앞서말한 대로

그는 영국의 재정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일단 처음 손댄 것은 당밀법이였다

이 법은 1733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럼주를 만들기 위한 당밀을, 외국(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할 시

거기에다가 세금을 붙이는 것이였다

 

초기에는 그냥 식민지인들에게 무시되었으나

그렌빌 내각 이후, 철저하게 징수했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이에 대응해 밀수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당밀법이 밀수 때문에 효과가 보이지 않자

1764년에 설탕법을 새로 만든다

 

이 법은 설탕에 부과되는 세금을 줄이는 대신에

세금을 집행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함으로써

세금을 어떻게든 받아먹으려는 조치였다

 

설탕법은 설탕 외에도 커피나 와인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다음해 1765년, 인지법이 통과된다

 

이것은 영국 정부가 승인한 출판물에 모두 세금을 붙이는 것으로

설탕도 모자라 종이에게까지 세금을 만드니

식민지인들은 미친듯이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세금징수원의 집이나, 관청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나온 유명한 말로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1669년 통과된 권리장전

의회의 동의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의원을 영국 의회가 거부했으면서

자신들의 의견도 없이 멋대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말도 안되지 않느냐 하며, 불만을 터뜨린 것이였다

 

 

4. 식민지 달래기

그렌빌의 뒤를 이어

제9대 총리, 로킹엄 후작이 이끄는

로킹엄 내각이 등장했다

 

그는 그렌빌과 다르게

북미 식민지에 조금 호의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1766년, 인지법 폐지와 설탕법의 세금 감액 등을 담은

선언령을 통과한다

 

이것은 영국 의회가 식민지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시켰는데

식민지 주민들이 의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지 않은

다소 애매모호한 표현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일단 세금 자체가 사라지거나 줄어든 것은 사실이였고

이것만으로도 큰 정치적인 승리였기 때문이였다

다만 소규모의 사람들이 우려한 내용이 뭐냐면

이 선언법이 1719년, 영국이 아일랜드와 맺은 선언령과 유사했던 것이였다

(사실상 단어만 바꿔치운 수준)

 

이 법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영국 의회에 종속되어버리는 꼴이 된다

 

 

5. 촉발된 불만

1768년, 보스턴에서 리버티라는 배가 

밀수 혐의로 세관 관리에게 압수되고

돌려받지 못한 채, 영국의 해군으로 이용된다

 

이에 분노한 식민지들은 그 배를 몰래 급습해

불에 다 태워버리는 데

이것은 저항 운동의 전조에 불과했다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이 터진다

 

이발값 문제로 민간인과 병사간의 말싸움으로 시작된 분쟁은

곧 서로간의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으며

병사의 발포로 인해, 5명이 숨지고 마는 사태로 커지고 말았다

 

병사 8명이 재판을 받았으나, 6명은 무죄 판결

나머지 2명은 살인 혐의로 사형을 받았지만

성직자의 도움으로 유죄 인정란에

엄지손가락 도장 찍는 걸로 형벌을 대신했다

(이뭐병)

영국의 해군 개스피 호

1772년에 상선 포츈을 강제로 멈춰서게 하고는

배를 조사하고, 신고되지 않은 럼주를 압수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을 하기 위한 곳으로

보스턴을 선택하고, 배와 럼주를 보스턴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식민지인들에게 큰 불만을 산다

조사는 그렇다고쳐도

재판에 관한 것은 총독의 권한인데

일개 해군 선장이 맘대로 재판 장소를 정한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또 분노한 식민지인들은

개스피가 간조 때문에 좌초된 틈을 타

몰래 작은 배를 타고가서

선원들을 다 내쫓고, 개스피 호를 불에 태워버린다

1773년, 이번에는 차법이였다

 

인도의 흉작으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의 재정이 씹창이 나버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미가 수입하는 차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독점과

차에 대한 세금을 더 붙이는 것이였다

 

아니 무슨 식민지가 흑우인줄 아나

분노한 식민지인들은

인디언 분장을 하고 

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다 던져버리니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놀라며

식민지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강압법을 통과한다

(미국에서는 참을 수 없는 행위라고 부름)

 

1. 식민지인들이 차 값을 지불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 폐쇄(보스턴 항구 법)

2. 앞으로 식민지의 모든 직책은, 의회가 임명할 것임(메사추세츠 정부 법)

3, 식민지에서 공정한 재판이 열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경우, 영국 내에서 재판을 새로 할 수 있음(사법 행정법)

4. 앞으로 주둔하는 영국군에 대한 주택 무상 제공(병영법)

 

 

 

6. 식민지의 대응

12개 주의 식민지들은 대륙 회의를 열고

현재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해결할지를 정한다

(조지아 주는 충성파가 득세해서, 참가안햇음)

 

이들은 이러한 사태에 합리적인 해결책을 만들고

영국과 식민지간의 화해를 주선하자는 보수파

 

영국 의회의 지배를 끝내고

식민지만의 다른 정치 기구를 만들자는 자유파로 나뉜다

온갖 주장이 난립하다가, 타협한 끝에

독립을 요구하는 대신에

1774년, 식민지는 영국의 상품을 불매하기로 결정한다

1775년 영국 정부도 이에 대응하여

북미 식민지에 무역 금수 조치를 취했고

양측간의 무력 충돌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서로 군수품을 더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영국과 식민지인간의 첫 전투가 벌어져버린다

(렉싱턴-콩코트 전투)

아직까지는 독립까지는 가지 말자는 주장이 주류였다

대륙회의는 영국의 조지 3세에게 화해를 구하는 것

보다 공평한 무역, 적절한 세금 규정을 원하는

올리브 가지 청원서를 보낸다

하지만 앞서 말한 전투 등으로 인해

식민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지 3세는 북미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렇게 양측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였다

 

 

 

7. 전쟁 발발

대륙 회의는 전쟁이 시작되자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로저 셔면, 로버트 리빙스턴으로 구성된

5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지 3세의 권리 침해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버지니아의 대표였던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제 전쟁이 시작됬고

저 새끼들이 우리들보고 반란군이라고 선언했으니

우리도 정식으로 독립했다고 선언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미국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과감하게 독립 선언한 것과는 달리

대륙군은 캐나다 침공을 실패한 것으로 시작하여

(퀘벡 전투)

두 배나 되는 대군에게

뉴욕도 뺏기고

(롱아일랜드 전투)

워싱턴 요새 또한 지켜내지 못함으로써

대륙군의 사기는 곧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워싱턴 요새 공방전)

 

이제 대륙군은 와해의 위기에 놓이는 데...?

 

 

 

8. 대륙군의 반격

대륙군은 사실상 와해 상태에 있었다

병사들은 거의 전의 상실 수준에 놓여있었고

잇다릉 탈영병으로 인해, 9할의 병사가 사라진 채였다

 

그 군대를 이끌던 워싱턴도 반쯤 포기한 상태였으나

당시 트랜틴에선 독일계 영국군 병사들이 나누어져 숙영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노린 워싱턴의 기습적인 공격이 성공함으로써

병사들은 오랜만의 승리로, 사기를 채워넣을 수 있었다

(트렌틴 전투)

사기가 올라간 대륙군이라고 하나

아직 전세는 영국이 우위였다

영국군은 대륙군을 항복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촉수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촉수질은 명백한 실수였다

그들은 보급을 신경쓰지 못했고

워싱턴의 1만 5천명의 군대에게 포위되는 판국에 이르렀다

 

6천명의 영국군은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하고, 항복해버린다

(새러토가 전투)

 

이것은 단기전으로 끝날 것 같은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9. 국제전

프랑스와 스페인은 미국에 대한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식민지인들은 또 다른 유럽 놈들과 손을 잡는 것에 대해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두 나라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프랑스는 일단 7년 전쟁의 복수를 하기 위함도 있었고

미국을 도와, 서 카리브 해 지역을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아이티나 카리브해의 설탕과 커피의 생산량이, 북미를 압도했었음)

 

스페인은 전쟁에서 승리할 시, 플로리다를 돌려받기로 한다

(7년 전쟁 땜에, 플로리다를 빼앗겼었음)

영국은 새러토가 전투 이후, 전술을 변경했는데

만약 이 전쟁이 장기전으로 지속되어, 패배하게 된다면

식민지 전역을 다 불태우면서, 그들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알게 해두자는 식이였다

 

"북미 식민지를 다시 가져올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테다!"

 

...하면서 북미 전역의 요새, 항구, 시가지 전체를 불태워버린다

영국군의 청야 전술

북미 식민지의 경제는 씹창으로 변했고

재정적으로 힘들어 군수품 조달을 못하니

의회가 강제적으로 상인들에게 값싸게 물건을 팔라고 법을 통과했지만

상인들은 당연히 판매를 거부했고

아예 영국에게 물건을 팔기까지 했다

아예 영국군으로 배신하는 놈까지 생기는 등

 

그렇게 전쟁은 영국 쪽을 기울고...

 

 

10. 전쟁의 종결

영국군은 프랑스 해군이

카리브 해를 비워둘 수는 없을 거라고 자만하면서

여유있게 보급품과 지원병력을 운반했지만

 

프랑스는 역으로 전병력을 이끌고 와서는

영국 해군을 털어버린다

(채서피크 해전)

당연히 보급품과 병력은 오지 않았고

요크타운에 갇혀 고립된 영국군은 결국 대륙군에 항복을 선언한다

(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고

대륙군을 비롯한 프랑스, 스페인 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파리 조약)

그렇게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지도자로 하는 국가가 탄생했다

 

아직 건국 초기라서 많은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과연 새로 독립한 이 신생국과

그걸 지켜보는 유럽 국가들의 미래엔 어떤 운명이 닥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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