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노예제 문제

노예문제는 인권운동 그런 것 보단
정치적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3/5 타협으로
각 주마다 선거인단 및 하원의원을 배정할 때
노예인구도 인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벌어졌다
노예인구를 주 인구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자유주 보다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의 60퍼센트만 인구에 포함시키는
3/5타협이 결정된다
(물론 노예에겐 선거권은 없었다)

그리고 1820년
저번에 소개했던 미주리 타협
점차 서부로 개척을 해나갈수록
새로운 주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만드는 족족 노예제가 합법인 곳이다 보니
상원에서 불리해질 것을 염려한 자유주가
북위 36도 30분 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 않을 것과
자유주와 노예주를 같은 수로 유지할 것을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타협도 얼마 못 가서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되는데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인해 광활한 영토를 얻게 되고
서부를 지나가는 대륙 횡단 철도를 짓게 되자
또 많은 개척민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었는데
본래 미주리 타협이였더라면
36도 30분 이북임에 따라 노예주가 금지였어야 하지만
노예주 여부는 개척자가 결정한다... 라는 이유로
미주리 협정이 사실상 폐기처리 되어버린다

그 결과
캔자스에서 자유주의자와 노예주의자의 대립이 발생해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되고
(피의 캔자스 사건)

미국 정치계도
노예에 관한 문제 때문에
휘그당에서 공화당이 새롭게 탄생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는다
2. 정치 위기

185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민주당은 제임스 뷰캐넌
공화당은 존 C 프리몬트
(분홍색은 필모어인데 이미 개박살이 난 휘그당 출신이다)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를 우선적으로 외친 탓에
남부 지역에서는 당연히 표를 얻지 못했고
공화당이 승리하면 나라가 분열될거다 하며
민주당이 선동을 떨어댄지라
대선은 제임스 뷰캐넌이 승리한다
(민주당의 선동은 4년후 어느 정도 사실로 나타난다)

그러던 중 1857년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이 터진다
드레드 스콧은 노예였으나
주인이 자유주로 근무지가 바뀜에 따라
스콧도 따라서 자유주로 왔는데
노예주가 불법인 자유주에서
과연 드레드 스콧은 계속 노예 상태이냐 아니냐의 것이였다
1심에선 스콧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 판결에서는 노예가 자유민이 됬든
이미 노예였던 이상 아무런 권리가 없다며
스콧의 소송을 기각한다

대법원장이였던 로저 토니는
이 재판 결과로 그 동안 미국을 뜨겁게 달궈왔던
노예 문제가 손쉽게 해결될거라고 믿었지만
애초에 토니의 판결내용 자체가
"노예인 네가 자유주에 들어왔다고 해도
네가 자유민이 되는건 아니야"... 였기 때문에
정반대로 북부와 공화당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남부에서도 분리주의가 강화되는 결과만 낳는다

북부와 남부의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화당 상원의원이였던
찰스 섬너가 노예제 폐지를 연설을 소리 높여 진행했는데
이에 불만을 잔뜩 품은
민주당 하원의원이였던
프레스턴 브룩스에게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지팡이로 힘껏 구타당한 사건이였다
(찰스 섬너 구타 사건)
브룩스는 의원직 박탈은 커녕 벌금 받는 선에서 끝났고
남부는 비판하긴 커녕,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는 수준이였다

1856년 대선을 보면
북부와 남부와의 격차가 커서
다음 대선도 꼼짝없이 북부의 패배로 당할 것 같았으나
남부의 분열이 일어나는 사건이 촉발되는데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가
서로 토론 대결을 벌이는데
(링컨-더글러스 논쟁)
링컨은 무조건 노예제 폐지 주장을 했고
더글라스는 각 주가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다소 온건적인 주장을 폈다
선거는 더글러스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이것은 민주당이 북부와 남부로 갈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1860년에 치뤄진 대선
남부의 광역 어그로에 굳게 단결한 북부의 공화당과
서로의 이견이 맞물려 분열되어버린 남부의 대결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손쉽게 승리하며 끝난다
(주황색은 존 벨이라는 입헌통일당 출신인데
휘그당을 전신으로 삼고 있고 민주당과 끝내 단일화를 거부했다)

링컨의 당선과 함께
더 이상 남부에서 노예를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미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 연맹을 창설한다
(전쟁 후,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 버지니아가 추가로 가입한다)

링컨 대통령은 남부연맹의 승인 요구와
평화 제의를 모두 거절하면서
연방 탈퇴는 불법이며
복귀하지 않을 시 무력도 사용하겠다며 언성을 높인다

1861년 4월 12일
양측 모두 물러서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남부군이 찰스턴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면서
남북전쟁의 서막을 알린다
3. 전쟁 초기

남북전쟁의 첫 유혈사태는
1861년 볼티모어 폭동이였다
메릴랜드는 노예주임에도
연방에서 탈퇴하지는 않았는데
딱히 북부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였고
국가가 남부와 분리하는 것을 안좋게 여겼기 때문이였다
다만, 북부군이 남부로 지나갈 때
자신들의 영역을 지나간다는 것을 본
시민들이 군대를 가로막으며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였다

양측 다 군대가 없어
초기엔 자원병으로 병사를 구성했는데
섬터 요새 사건 때문인지
수많은 병사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금방 열기가 사글아들어서
양측 모두 징병법을 도입해 마구잡이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북부군에서는 전 병력 중 25%가 15세 미만의 소년병이였다(!)

뉴욕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는데
원인이 상당히 복잡했다
징병법에 의한 거부가 원인이긴 한데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아일랜드나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이였고
저임금 노동을 하면서 노예들이 자유롭게 해방이 되자
일자리를 놓고 흑인들과 싸우며 분노가 촉발된 것이였다
또한 징병 영장도 문제가 되었는데
상류층은 대체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징병에서 제외되었고
흑인은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징병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북부의 경우 흑인 노예들이 자원 입대하긴 한다)

북부군은 전쟁이 몇 달안에 끝날 것이며
물자도 자원도 우리가 모두 우세하니 방심했지만
남부군은 격렬히 싸우면서 북부군을 패퇴하게 만든다
이것은 북부군의 생각과 달리
전쟁이 생각보다 오래 갈것임을 의미했다
(제1차 불런 전투)

북부군은 더 많은 병사를 동원하고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한 공세를시작하나
로버트 리 장군에 의해 가로막히고 철군해야만 했다
(셰넌도어 계곡 전투)

북부의 조지 매를렐런 장군은 리 장군에게 계속 처맞기만 하다가
겨우 앤티텀 전투에서 남부군의 공세를 멈추고
얼마 후,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며
영국과 프랑스 등, 타 국가의 외교적 개입을 차단시킨다
4. 전쟁 중기

1861년 6월
남부군은 어마어마한 실수를 범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켄터키 주는 어느 정부의 편도 안드는 중립 정책을 폈지만
남부군이 켄터키 주의 콜럼버스시를 점령해버린 것
켄터키는 남부가 북부의 공세를 막는
일종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스스로 걷어차버린 격이였다

1862년 4월
켄터키 주가 뚫리자
북부군의 그랜트 장군은 테네시 강의 수로를 이용해
곳곳의 요새들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샤일로 전투)
얼마 안가 뉴올리언즈도 해군이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남부군은 이때부터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1862년 11월
그랜트는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빅스버그 요새를 포위했고
보급이 끊긴 남부군은 구원을 요청했으나
리 장군은 차라리 구원을 보낼 바에
북부에 대한 공세를 펼쳐 전세를 뒤집는게 낫다고 판단해버린다
결국 빅스버그는 항복했고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은 북부에게 넘어갔으며
남부는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져버린다
(빅스버그 전투)

리 장군이 계획한 북부 공세가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역이였다
재빠르게 워싱턴 앞까지 기습하여
북부군의 사기를 떨구는 동시에
남부군이 잠시 숨 돌릴 틈을 주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북부군의 재빠른 대응으로 별 성과는 없었고
이것은 남부군 최후의 공세였다
5. 전쟁 말기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서부전역은 셔먼이 대신 맡게 되었는데
북부군이 드디어 깨달은 사실이 바로
어느 하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전쟁이 안 끝날 것이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남부의 전쟁의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애틀란타를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다 불태우기 시작한다
(애틀란타 전역)

셔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지아주 남부 해안 서배너까지
보이는 도시의 철도, 건물, 식량 등
모든 것을 다 파괴시킨다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

남부군의 존 후드가 이 짓 막아보겠다며
이미 사기가 저하되어
탈영병이 발생하는 군대 가지고
포위 섬멸하겠다며
안 그래도 모자란 병사들을 쪼개가며 공격했고
역으로 괴멸당하면서 서부전선이 사실상 종결되버린다
(프랭클린-내슈빌 전역)

동부전선도 마찬가지였다
게티즈버그 공세의 실패로 인해
리 장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닥치고 방어 뿐이였고
끝내 한계에 봉착하면서
1865년 4월 9일
애퍼매턱스에서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이 종결된다
이 뒤로도 무장 투쟁을 이어나가거나
문서상으로 항복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
정확히 언제 끝나느냐에는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1866년 8월 20일에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발표하긴 한다
6. 그 후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1주일도 못가서
1865년 4월 14일
포드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다가
존 월크스 부스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한다

대통령은 앤드류 존슨이 이어받는다
알래스카도 매입하고, 내전 후 재건도 시작했고
최초로 탄핵당할 뻔한 대통령으로 기록에 오른다

노예들은 해방당한 이후
자유민이 되어 시민권도 얻고, 투표권도 얻었으나
재건이 끝나고 연방군이 철수해버리자
남부 주들은 짐 크로 법으로 인종분리를 실시하면서
유색인종에 관한 탄압을 실시해나갔다

흑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순간은
아마도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