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프로이센 전쟁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프랑스의 고민

지난번에 소개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7주만에 승리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 문제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프로이센은 독일 국가를 하나로 묶은
북독일 연방을 창설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비스마르크에게 딜(Deal)을 넣고 있었는데
중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프랑스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병합하게 해줄 것
그리고 이탈리아가 베네치아를 먹지 않을 것이였다
프랑스로서는 독일마저도 벅찬데
이탈리아가 통일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였다
나폴레옹의 구상은
베네치아를 프랑스가 먹은 다음
라인강 일대에 중립국을 새로 세울 생각이였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상술한 요구 사항을 들이밀며
자신들이 중립을 지킬 것을 제안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이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비스마르크의 침묵을
긍정적인 표시로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망상을 해버린 것이였다(!)

프랑스가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명확했는데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수립된
프랑스 제2제국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멕시코 정벌하러 원정나갔다가 대실패한 것도 있었고
공화주의자의 암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병합함으로써
국내의 불만은 물론이고,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감정을
나름 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한 것이였다
그리고 처참히 무시당했다

국내의 불만도 불만이지만
국외적으로 프랑스의 유럽에서의 위치가
따오르는 프로이센의 영향력에 가려질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독일 포위망을 위한
동맹국들을 찾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2. 도리어 고립된 프랑스

프랑스는 먼저 이탈리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협상은 전혀 순조롭지 않았는데
바로 이탈리아 통일의 마지막 단추였던 로마 문제 때문이였다
프랑스는 로마에 군대를 보내, 로마를 지키게 했는데
이탈리아로서는 통일을 위해서는 로마만을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다
나폴레옹 3세는 교황 비오 9세에게
여러가지 협상안을 내놓은 적이 있지만, 그가 죄다 거부했고
프랑스 내 가톨릭 신자들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의 동맹은 결국 좌절되버린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프랑스를 지원하길 원했지만
로마 문제를 둘러싼 이탈리아인 여론 때문에 실패)

그럼 다음은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지지만 보내준다면
프로이센을 띠꺼워하는 남부 독일 국가들이 합세해
충분히 독일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였다
오스트리아 또한 복수에 열을 올렸으나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붙어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지난날의 양면전쟁이 떠오른건지 거절해버린다
덧붙이자면 위 사진의 오스트리아 수상 보이스트는
독일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지만
헝가리 총리 언드라시 줄러가 격렬하게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 여긴 더 어려웠던게
1863년, 폴란드 반군이 러시아를 상대로 봉기했을 때
(1월 봉기)
프랑스는 이 반군들을 지원한 전력이 있었고
러시아를 지원한 나라는 프로이센이 유일했다
더군다나 1867년에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프랑스를 방문한 전력이 있었는데
폴란드인 안톤 베레조프스키에게 암살을 당할 뻔 했다
근데 프랑스의 언론과 법원은 이 암살범의 편을 들어줬고
베레조프스키는 사형이 아닌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심지어 무기징역도 아니였다)
이 사실에 러시아는 단단히 분개하며 프로이센과 붙어먹는다

그럼 남은 것은 영국인데
영국은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즉,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저지대를
자기네들이 냠냠하려고 했던 소식에
많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영국은 프랑스를 돕지 않기로 했다

어디보자 영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열강이라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를 적으로 돌려놨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국경이 붙어있는 스페인 뿐인가?
어라...?
3. 군주제 위기

스페인은 이사벨 2세가
1868년 9월에 일어난 스페인 명예 혁명으로 쫓겨난 탓에
계속 빈자리로 남아 있었고
새로운 군주로
빌헬름 1세의 먼 사촌이였던
독일의 레오폴드 왕자가 떠올랐다

사실 레오폴드는 스페인 군주의 자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설득 때문에 별 수 없이 수락했고
당연히 지리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 3세는 이에 날카롭게 항의하며 언성을 높였고
아예 전쟁까지 불사할 것임을 선언했다

프로이센은 이에 왕위를 포기했지만
프랑스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엠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빌헬름 1세를 찾아가
다시는 독일인이 스페인 군주를 맡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해둘 것을 요구한다

빌헬름 1세는 이미 거절했는데도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에 빈정이 상했지만서도
프랑스 대사를 친절하게 대했고
비스마르크에게 있었던 일을 전보로 보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셈으로
황제의 전보를 조작하여
프랑스 대사를 꾸짖어 내쳤다는 정보를 언론에 뿌린다
(엠스 전보 사건)
당연히 자기네 대사가 모욕을 당했다는
프랑스의 군중들은 전쟁을 요구했고
나폴레옹 3세도 더 이상의 여론을 통제하지 못한 채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한다
4. 전쟁

프랑스의 여론은 독일이 군대를 소집하기 전에
먼저 선빵을 쳐야한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독일이 철도망을 깔아
빠른 시간안에 군대를 동원한 것과 다르게
프랑스는 군 개혁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
전쟁이 터저버린 나머지, 동원이 매우 껄끄러운 상태였다
프랑스는 일단 자르 지방을 향한 기습전투를 시행했으나
3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1400명의 병력을 상대하여
고작 83명의 피해를 주고, 겨우 점령하는 추태를 보인다
(여기서 프랑스 사망자는 86명...)

프랑스가 동원하느라 기습하느라
개뻘짓을 벌이는 동안
프로이센은 자르 지방에서 조금 떨어진
비상부르 지방을 공격하고 승리한다
(비상부르 전투)
다만, 프로이센 병사들이
이 전쟁에서 꽤 많은 수가 사망하는데
이는 프랑스의 소총이 독일제보다 우월했기 때문이였다

프랑스는 처음 기습이 성공한 이후로
단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다
장교 자체의 무능함부터 시작해서
(마르스라투라 전투)

반격만 해도 쓸어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망치는 우유부단함에
(포에슈니에 전투)

포병의 위험성을 전혀 생각치도 않은 채
닥치고 방어만 하면, 철수할 거라는 과대망상에...
(그라벨로트 전투)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던
프랑스군 15만명은 메츠 요새에서 방어하다가
2개월만에 독일군에 항복을 하고 만다
(메츠 공성전)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메츠 요새의 병사들을 구원하러 가겠다고
13만명의 군대를 직접 굴리며 진격하지만

1870년 9월 2일
도리어 독일군의 함정에 빠지며
본인들도 포위되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물자가 바닥날 때까지 싸우다가
황제가 백기를 내걸며 항복하고 만다
(스당 전투)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지
약 6주 쯤 되는 시기였다
5. 국민방위정부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신속한 평화를 체결했던 것과 다르게
비스마르크는 이미 프랑스의 황제를 붙잡았으니
파리로 천천히 진격해도 별 상관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상비군이 개털리고
황제가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에
제국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며
자신들을 국민방위정부로 칭한다
(대통령은 위 사진의 루이 쥘 트로쉬)
비스마르크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자스-로렌을 할양하는 대가로
양측간의 전쟁을 종전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게 거부되면서 전쟁은 다시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의 상비군은 이미 소진된 상태였기에
독일은 별 저항없이 9월 15일, 파리에 당도했고

파리의 시민들은
쥐, 개, 고양이, 말은 물론이고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잡아먹으며 버텼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 상황이였기에
1871년 1월 28일
결국 도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국민방위정부는 항복하며 휴전협정을 맺는다
6. 여파

독일은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지방의 할양과
50억 프랑 배상금을 요구했고
파리 시내에서 군사 퍼레이드도 벌인다

그리고 독일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제2제국을 선포하며
마침내 독일 통일의 과제를 완료한다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제3공화국이 탄생했지만
패전의 불만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봉기하여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이 등장한다

국가 자체가 사회주의식 정책을 펼쳤지만
얼마 안가 정부군에 진압되면서
파리 코뮌은 약 2개월 만에 단명되어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이 공산주의 국가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례로 여기며
미래에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될 경우 참고할 만한 것으로 뽑았다
아무튼 서쪽에서는 하나의 민족국가가 수립되는 동안
동쪽에서는 하나의 정부를 위한 길을 달려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