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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본문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떠오르는 별

윾겜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통치하되
사실상 각각의 나라가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고
황제가 사망할 경우
선제후라고 불리는 통치자 7명이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스트리아는 점점 쇠락하기 시작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한 체제가 되어갔으며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국가들은 타 국가들을 집어삼키며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광기어린 전쟁 탓에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 되는 수순을 밟았고
후신격인 독일 연방이 창설되었지만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프로이센은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와의 세력 다툼을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인의 저력을 보여준
나폴레옹의 전쟁을 통해
독일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했으며
독일인들의 통일 국가에 대한 두 가지 방식이 제안되었으니
독일 지방과 오스트리아를 합친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주의였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두 번째인 소독일주의를 채택한다
대독일주의는
후세의 콧수염 예술가가...
2. 독-오 경쟁

그렇게 통일을 마음먹은 시점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눈치게임은 안 봐도 뻔했다
사실 이탈리아 통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분열되있던 나라가 갑자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주변국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눈치는 아니였다

이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는데
바로 1848년 혁명으로
독일 연방이 해체되어버리고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설립되었고
(다만, 이 의회도 얼마 안가 붕괴되어버림)

184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새로운 독일 연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는 데
이번엔 오스트리아 주도 하가 아닌
호엔촐레른 가문이 주도하는 에른푸르트 연방이였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및 이탈리아의 반란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틈에
다른 독일 국가들도 끌어들이기도 했으나

독일 국가라는 등장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까지 끌어들이며
새로운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오스트리아에게 넘기는
올뮈츠 협약을 체결하며 무산되었다
독일에서는 올뮈츠의 굴욕이라고도 부르는 사건이다
3. 철혈정책

비스마르크는 여기서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 통일을 위해서라면
우선 오스트리아를 조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엄청난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선
병신같은 자유주의는 개나 줘버리고
강한 독재와 많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군비 확장이 절실했다
"1848년의 병신같은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Eisen und Blut)만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징병 정책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문서상으로만 징병대상이 되어
전쟁이 나야 소집을 시켜놓고
훈련을 처음부터 해야했던 오스트리아와는 다르게
프로이센은 동등한 3년 복무 체제를 완성시켰고
체계적인 훈련을 하여 질 좋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동원 속도도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분리주의 반란을 염려하여
예비군이나 휴가나온 병사들은 고향은 물론이고
각기 따로따로 배치하는 결정을 하여
전쟁 발발시 동원 속도가 현저히 느렸던 반면
프로이센은 철도망을 곳곳에 깔아놓은 덕에
오스트리아군보다 더 많은 병사를 더 빠른 시간 내에 이송할 수 있었고
군을 지역 가까이에 배치한 덕에 소집 또한 빨랐다

무기 개발도
프로이센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군보다 더 많은 사거리를 가진 소총의 개발은
오스트리아군이 주로 쓰던 충격 전술을 힘들게 만들었으며
대체로 기병의 경우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번외로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으로 고립 상태였다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얻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 프로이센 정책을 펼치며 무시한다
프랑스는 중립을 대가로
프로이센에게 영토를 요구했는데
비스마르크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자기 혼자 수락했다고 생각하며 전쟁에 중립을 지킨다
(이거 때문에 후일 발생한 일은...)
4. 개전

1866년
결국 충돌 끝에 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의 첫 전투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군의 만남이였다
자신만만하게 쳐들어갔으나
오스트리아군에게 무참하게 털리고 말았고
이대로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감행했다면
속절없이 이탈리아 왕국이 무너질 수도 있었으나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오구리군의 알브레히트 대공은 진격을 포기한다
(쿠스토사 전투)

프로이센과 오구리 간의 첫 전투는
프로이센의 대승리로 끝나는데
오구리는 프로이센의 기술을 개무시하고
기병을 이용한 개돌 전술을 감행하다 큰 피해를 입는다
(나호트 전투)

하노버와 바이에른 같은
독일 내 커다란 왕국들은
자신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편에 붙었는데
이 중에 하노버는 프로이센의 공세를 막아내고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시간만 끈 형국이 되어버려
포위되버린 후, 프로이센에 항복해버린다
하노버처럼 오스트리아를 위해
10만명이 넘는 군대가 모여들었지만
하노버가 무너지면서 그들은 쓸모없는 군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전투는 최초로 적십자가 활동한 전투이기도 한다
(랑엔살자 전투)

1866년 7월 3일
전쟁의 운명을 결정 지을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발발했다
아무리 프로이센의 총이 우수하다고 하나
기관총도 없던 시대에
오스트리아의 포병과 기병은 여전히 우세했으며
오스트리아 내로 파고들었던 탓에
프로이센의 보급망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숫적으로도 오구리군이 우세한 상황이였다

하지만 전투는 평지가 아니라
스위트발트 숲에서 일어났고
기병은 도저히 진격할 수 없었고
포병은 도저히 포격할 수 없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자군의 아무런 이점도 살리지 못한 채
지휘관이 죽거나 쓸려나가는 등
약 3만명의 피해를 입는다

이탈리아는 해전에서도 패배한다
주요 원인으로는 해군 지휘관의 알력 다툼으로
누구는 싸우는데 누구는 삐쳐서 안싸운게 컸다
덤으로 져놓고는 이겼다고 뻥을 쳤고
이탈리아 군중들은 그걸 믿고는
실제 결과가 공개 될 때까지, 축하 행사를 벌인다
(리사 해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나 러시아의 개입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복수를 불태울 것을 염려하여
전쟁의 계속 보다는 빠르게 평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고
1866년 8월 23일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주도 하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평화를 맺는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5. 결과

솔직히 정말 뭐 한게 있나 싶은 이탈리아지만
아무튼 프로이센의 편에 선 공로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할양받고
그토록 염원하던 이탈리아 통일을 마무리 짓는다

프로이센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오구리는 아예 국가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헝가리와 대타협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세운다

이 병신 새끼는
왜 영토 안주냐고 역정을 냈고
약 4년 후,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오구리는 더 이상 독일에 뭐라 간섭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없었고
프로이센은 1867년
북독일 연방을 창설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은 이게 끝이 아니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