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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동맹 전쟁 본문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남아메리카의 상황

181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파라과이는
여러 군 장교들이 이어 통치하다가
1841년 로페즈 가문이 통치권을 먹게 된다
1862년 카를로스 안토니아 로페즈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즈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그는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파라과이의 경제를 통제했고
해외의 채권을 전혀 받지 않은 덕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같은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라고 불릴 수준이였다

1825년, 브라질이 소유 하였던
시스플라티나 지방이 독립을 선포하고
이를 지원하던 아르헨티나와 막으려던 브라질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무역에 위협을 예상한 영국의 중재로
우루과이가 독립하면서 전쟁은 3년만에 종결된다
(브라질-아르헨티나 전쟁)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한 브라질이였고
대중들의 불만으로 인해 페드로 1세는
5살 짜리 아들에게 국왕 자리를 넘겨주고
고향 포르투갈로 튀어버린다
페드로 2세는 1889년 퇴위 당할 때까지 브라질을 통치

파라과이의 대통령 로페즈는 높은 관세 정책으로 인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큰 분쟁을 겪고 있었고
전임자들의 고립정책과 달리
우루과이를 얻어 내륙 지방에서 탈피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사건이 터진다
1864년
파라과이는 우루과이의 집권 정부인
블랑코당을 지원해주며
우루과이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이에 브라질이 군사적으로 개입해
블랑코당을 몰아내고, 콜로라도당을 집권시킨 것이였다
(우루과이 전쟁)
2. 개전

파라과이는 당장 철수할 것을 요청했지만
브라질은 거의 무시로 일관했고
1864년 12월 13일
파라과이는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보낸다

파라과이가 가장 발전된 나라라고 불린 만큼
남미에서 파라과이 군대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초반에는 파라과이군의 압승이 이어졌고
이렇게 전쟁은 파라과이로 기우는 듯 싶었으나...

파라과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아르헨티나는 전쟁이 발발하자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군사 통행권 요청을 모두 거부하며
중립을 지키는 쪽을 택했으나
1865년 3월 9일
이것을 아니꼽게 여긴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에도 냅다 전쟁을 선포한 것이였다

파라과이의 선전포고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삼국 동맹을 결성한다
우루과이는 1865년 2월에
브라질의 정부 전복이 성공하자
브라질의 동맹으로 이미 참전한 상황이였다

1865년 6월 11일
파라과이는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지만
도리어 자국의 해군이 박살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 시점으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리아추엘로 전투)
3. 전세역전

해군 믿고 브라질 땅으로 돌격했던
파라과이군 8천명은 보급이 끊겨
굶어죽기 직전에 항복했고
(우루구아이아나 공성전)
연합군은 파라과이에 대한 공세에 들어갔다

연합군이 자국의 영토에 침입하자
파라과이군은 2만6천명 정도의 병사를 대거 투입하여
연합군을 쫓아낼 생각을 꾸몄지만
재수 없게도 돌격한 곳이 진흙탕이였고
엄청난 포격 세례를 맞다가 1만 3천명을 잃고 후퇴해버린다
(제1차 투유티 전투)

1866년 9월 1일
연합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자신들이 보유한 많은 대포를 상실한다
이때부터 정규군은 기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쿠르즈 전투)

이대로면 패전은 확실해 보였으나
1866년 9월 22일
디아즈 장군이 연합군을 유도하고
그 자리에 남은 병력을 모두 투입시켜
연합군의 공세를 10개월 씩이나 중단시키는데 성공한다
(쿠루파이티 전투)

그렇게 잠시 전쟁은 멈추고
파라과이와 연합군은 종전 협정에 들어가지만
로페즈의 퇴위와 파라과이의 비무장, 영토 할양이 요구되었고
이에 격분한 로페즈는 배째라는 자세로 일관한다
4. 전쟁의 끝

1867년 11월 13일
파라과이군은 지난날 패배했던 장소에서
이번에는 적군에게서 승리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후퇴하는 군대를 쫓아가지 않고
적군의 보급품을 모두 털어가기만 하는데
그 정도로 파라과이군은 굶주려 있던 상태였고
군기 또한 해이해져,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제2차 투유티 전투)

군기는 그렇다 치고
충원하기에 충분한 성인 남성도 없었다
결국 로페즈는 어린이(!)를 징병 대상에 포함시키고
전국 각지에서 6만명을 입대시킨다

1869년 1월 1일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당한다
브라질은 이제 그만 항복할 것을 권고하지만
로페즈는 상황 파악을 못한 건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산악 지대로 도망가버린다

1869년 8월 15일
파라과이는 이미 연합군의 수중에 넘어가 있었고
카를로스 로자가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선포한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로페즈가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산악 지대로 도망간 후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였다

1870년 3월 1일
로페즈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400명의 병력으로
10배에 달하는 병력과 맞서다가
창을 복부에 맞는 치명상을 입었고
겨우 탈출하는 그를 발견한 브라질군에게도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다가 총을 맞고 사망한다
이렇게 삼국 동맹 전쟁이 끝난다
5. 결과

파라과이는 남성이란 남성을 모두 군인으로 끌여다 썼고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까지 겹쳐
많은 인구가 질병, 굶주림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현재에서도 얼마나 죽었는지는 제대로 된 추정치가 안나오고 있다
인구 130만이였던 파라과이가
전쟁을 통해 90%가 사망해버리고
남자는 단 3만명만 살아남아
성비가 1대9가 유지되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130만은 말이 안되고
원래 인구는 30~4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전쟁을 통한 사망률은 25~45%로 예상하고 있다
그래도 1/4라고 해도
엄청난 수치 아닌가?

연합군도 대강 1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아니라
콜레라로 인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다
크림 전쟁에서도 그랬듯이
위생 상태 개선과 항생제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의 전쟁은
항상 질병으로 죽는 자가 더 많은 수를 유지했다

아무튼 남성이란 남성
적어도 12살 부터 모두 다 징병해버리는 바람에
전후 파라과이는 성비가 매우 막장이였고
남성이 하던 거의 모든 직업을 여성이 모두 해야만 했다

파라과이는 국토의 40%를 뜯기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둔하는 동시에
브라질의 영향을 받는 친브라질파 콜로라도 정당이 집권한다
이후에는 콜로라도 정당에 맞서 내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영토 때문에 볼리비아와도 전쟁을 벌이는 등
극심한 역사를 겪는데 그것은 일단 나중의 일이다
이렇게 북미와 남미에서 분쟁이 모두 일단락 되었고
다음은 중부 유럽의 패권 경쟁을 놓고
신흥 강대국과 구 강대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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