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소

흑선내항 본문

기타/역사

흑선내항

개성공단 2021. 11. 17. 20:54

1. 미 제국주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구세계에 신세계적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명백한 운명'이라고 칭하여 서쪽으로 팽창해나갔다

 

루이지애나부터, 멕시코, 캘리포니아까지...

육상으로는 더 먹을 수 없음을 자각한 미국인들은

저 바다 건너 어딘가로 눈길을 돌린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을 털어가면서

무역 수익을 증대시키고 있었지만

 

이 두 나라에 비해

미국은 그다지 많은 영향력을 얻지 못했고

이 당시 윤활유나 램프의 원료로

향유 고래의 고래 기름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서양 국가들은 주로 일본 연안에서 포경 활동을 해왔다

 

장기간의 항해를 위한 보급 또는 난파선 문제 등

미국은 이를 위해 일본에 거점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근데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수백년간 쇄국 정책이 이어져 온 나라 아니던가?

 

2. 쇄국 정책

일본이 왜 쇄국 정책을 하게 됬는가는

간략히 말하자면 대략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막부의 안정화

 

전국시대에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스스로 무역을 꾸려나가면서 돈을 벌고

그 수익을 이용해 전쟁을 이루어나갔기에

 

에도 막부는 이를 제한하여

무역을 국가만의 것으로 만들어, 다이묘를 견제 했던 것이다

 

(이거 말고도 아내랑 자식을 인질로 맡겨야 했고

에도와 자신의 영지에서 번갈아 살아야 했던 것도 있다)

나머지 하나는 카톨릭인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상으로

 

이들은 일본에 종교를 퍼뜨리고는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에 삼을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청교도 영국인과 개신교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베리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주장해댔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인들과의 무역은

위 사진처럼 데지마라는 인공 섬을 만들고

격리시킨 다음에서야 이루어졌고

 

(마카오에서 온 포르투갈인들도 있었는데

기독교인의 봉기로 인해 모조리 추방당함)

류큐나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물품이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정도였다

 

 

3. 출항

아무튼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매튜 C. 페리를 제독으로 삼아 함대를 보내기로 한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였는데 

하필이면 타국 외교관이랑 다투는 바람에 해임된다)

이 때 네덜란드 외교관이였던 쿠르티우스

미국이 무리한 조약을 강요하려고 오고 있다며 경고했고

외부로 인해 엄청난 변화가 생기기 전에

자국 스스로 쇄국 정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미국에게 당하기 전에

네덜란드와 먼저 통상 조약을 맺자고 했다가 거절당한다)

페리의 함대는 노퍽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지나,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류쿠를 지나가며

 

1853년 7월

일본의 요코스카에 도착했다

 

 

서양의 배는 검었기에

일본인들은 흑선(黒船, 쿠로후네)이라고 불렀다

페리 제독은 대통령 친서와

(이 당시 대통령은 필 모어)

 

일본에 원하는 조약들을 들이밀었지만

 

이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

병으로 드러누워 있었기에

도무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였다

막부 측도 이 상태를 전달하며, 1년의 유예를 요청했고

 

페리 제독도 이에 수긍하며, 1년 뒤에 오기로 결정했다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페리가 떠난 지 10일 후에 사망했고

그 후계자인 이에사다는 아무리봐도 국정을 수행할 인재로 보이지 않았으며

개항 문제에도 전혀 하나된 의견이 모이지 않으니

막부의 권위는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4. 개항

1854년 2월

고작 7개월 만에 다시 온 페리 일행

 

에도 막부는 내부에서 서양에 대한 반대 세력도 감지했지만

더 이상의 저항은 무리였다고 판단하여

 

페리가 제안한 거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이 와중에 어떻게든 시간 좀 끌어보려고

협상 장소를 어디에서 할 건지 계속 말을 바꿨고

 

빡친 페리는 함선 100척을 이끌고

일본을 초토화 시키겠다고 개뻥을 친다

(실제 미 해군은 100척을 못 넘었다고 함)

 

황급히 놀란 막부는 요코하마로 장소를 정한다

 

1854년 3월

일본은 미국에 개방하고,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는 등

250년간 이어진 쇄국 정책의 종말을 맞이했고

(일미화친조약, 가나가와 조약)

 

1858년 7월

조약을 더 강화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굴욕적인 불평등조약

금 유출로 인한 경제파탄을 맞은 민중들은

천황을 다시 옹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존황양이파 등, 반막부 여론이 형성되버린다

막부가 결성된 이래

오랫동안 가만히 입닥치고 있던 다른 천황과 달리

고메이 덴노는 막부에 결정하면서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운다

 

나중에 서양인 배제 칙령을 내리기도 하지만

서양 연합군에게 뒤지게 처맞으면서 실패로 끝난다

(시모노세키 전쟁)

1858년

페리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일본 원정에 대한 출판물을 작성하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죽었고

페리가 쓰던 성조기는

1945년, 미국과의 항복 조인식에서 

다시 한번 내걸렸다고 한다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공수해 왔다고 함)

 

 

 

 

막부는 위기를 타파할 수 있을까?

'기타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통일  (0) 2021.11.17
세포이 항쟁  (0) 2021.11.17
제2차 아편 전쟁  (0) 2021.11.17
역사 교수가 본 VIC2 1부(2/2)  (0) 2021.11.17
역사 교수가 본 VIC2 1부(1/2)  (0) 2021.11.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