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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방 위기

개성공단 2022. 2. 10. 12:31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불안정한 오스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슬슬 파탄날 것 같은

오스만 제국을 살려내기 위해

수구적인 예니체리 군단을 폐지하거나

종교의 자유화, 기본권 보장, 의회의 권환 확대 등의

여러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고

(탄지마트)

그의 아들 압뒬메지트 1세

아버지의 업적을 뒤따르려 노력했으나

유럽에서 끌어온 채무를 갚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당시 지배하고 있던

발칸 반도의 비무슬림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정책을 펼쳐버린다

오스만 제국이 거두는 세금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생산된 상품과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자카트

그리고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이 병역 면제를 위한 지즈야가 있었다

 

위의 탄지마트 개혁을 통해

제국 내의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세금을 부여하려 노력했으나

걷는 세금에 비해, 내는 지출이 너무나도 많았고

 

특히 비무슬림의 경우 

정부에서 걷는 것과 동시에

따로 관료 개인이 뜯어가는 것도 있어 불만이 폭증하였다

거기다가 세수 확보를 위해

와인, 증류주에 부과하는 주세법까지 만들었으니...

 

근데 무슬림이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주세법은 누가봐도 비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것이였다

결국 이런 상황은

 

1875년

헤르체고비나에서 오스만에 대항하는 봉기가 벌어지며

쌓여왔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헤르체고비나 봉기)

 

 

 

2. 러시아 개입

탄지마트 개혁으로

모든 국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보장했지만

 

이 권리는 세금을 내야 인정받는 것이였고

가혹한 세금을 내지 못한 불가리아인은 2등 국민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불가리아인들은 이 상황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오스만들은 이에 대해 잔인한 학살로 보답해버린다

(1876년 4월 봉기)

불가리아인의 잔혹한 참상에

각 유럽 국가들이 이 사태를 비판했는데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는 바로 러시아였다

 

일찍이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하던

러시아는 이 사태를 이용해 정교회 지역을 하나로 통합할 계획을 세웠고

오스만에 대한 개입 준비를 시작한다

1876년 6월 30일

 

헤르체고비나 봉기가 주변으로 확산되자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몬테네그로 또한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 전쟁을 선포한다

(몬테네그로-오스만 전쟁)

러시아는 정교회의 수호자 명분 말고도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한 오스만의 복수에도 열을 올렸는데

 

대표적으로 군사적인 재건을 위해

프로이센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쓰러뜨리자

그 덕택에 흑해에 해군을 다시 주둔시킬 수 있었다

1877년 4월 24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오스만 지배하의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하며 진군하기 시작했으며

 

1877년 5월 10일

루마니아 공국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였다

 

 

 

3. 불곰의 습격

러시아는 멍청하게도 오스만보다 

군대를 적게 끌고 오는 바람에 

한 번의 공세가 실패로 끝난 이후

아무런 공세도 취하지 않았고

 

오스만은 그것도 모르고

오직 방어적인 전략만 취하는 등

 

약 2개월 동안 

두 나라의 군대가 아무것도 안하는 일이 벌어진다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다면

도나우 강 확보를 위한

 

두 나라간의 해전에서

세계 최초로 어뢰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어뢰정이 오스만 함선을 침몰시킨다

(마친 해전)

러시아는 군대를 더 불러들였고

 

동시에 러시아의 개입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세르비아가 동조하고

학살에 울분을 품고 있던 불가리아 의용군이 합세함으로써

오스만군은 완전히 고립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요새를 떡칠하여

적군의 공격을 빈틈없이 틀어막는다는

수비적인 전략을 취한 오스만이였지만

 

보급이 전혀 안되니

요새는 하나하나씩 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불가리아 연합군은

기동에 매우 유리한 시프카 언덕을 점령했고

 

오스만은 4차례나 언덕을 다시 수복하기 위한 공세를 펼쳤으나

연합군이 돌과 시체까지 던지며 싸울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하자 오스만군은 철수해버렸고

여기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시프카 언덕 전투)

승기를 잡은 러시아는 곧장 콘스탄티노플을 향했고

 

영국이 이것을 견제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자

 

1878년 1월 31일

오스만 제국이 휴전을 받아들이면서 전쟁을 끝낸다

 

 

 

4. 유럽의 환자

러시아군은 산 스테파노란 곳에서 멈춰섰고

 

양자간의 종전 협상을 위해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의 독립 인정 및 영토 할양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였지만

사실상의 독립적인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다만 루마니아는 러시아에게

남부 베사라비아를 양도해야 했던 탓에 불만이 컸고

 

알바니아인들은 자신이 살던 지역이

아무런 힘도 없이 타 발칸 국가들에게 넘어가자

 

언젠가 알바니아 지역도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게

4분할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프리즈렌 동맹을 창설한다

산 스테파노 조약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히 대영제국이였다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중에

여기서 러시아의 중동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될 경우

자신들의 식민지에 위협을 끼칠 것으로 보았고

동시에 영국의 힘에 대한 도전으로 판단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슬라브 민족들이 오스만을 때려 눕히고

독립국가를 건설한 마당에

이 불똥이 이중제국에도 미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였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는 데

 

이 양반이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독일에 아무런 이점이 없던 사건에는

평화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며 가장 공정한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였다

베를린 회의 결과

 

러시아와 발칸 국가들은

그리 좋지 못한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오스만의 약화와 러시아의 부상을 견제한

타 열강 국가들로 인해

연합군은 얻은 땅 일부를 도로 뱉어내야 했고

 

불가리아의 경우 명목상의 자치권이 부여되고 말았다

비스마르크는 이 사태를 통해

더 이상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국가들과의 동맹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열강이 좌지우지하는 대로

오스만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했고

'유럽의 환자'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술탄은

압뒬하미트 2세인데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원인을 

탄지마트 개혁으로 보고는

거의 모든 것을 개혁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려 버린다

여기서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며 넘겨받는 일을 저지르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오스트리아와 슬라브 민족주의자간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미지 순서 OFF

오스트리아와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다시 화해의 길을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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