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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전쟁 본문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무역 분쟁
방데 말고 반도 가져옴
1807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나폴레옹은 아직도 저항하는 영국을 괘씸히 여기고는
영국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것을 무시하는 데
영국과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동맹국이였다
포르투갈도 먹고 살기 위해 교역을 계속했고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리스본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외무장관 탈레랑페리고르를 보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선박과 영국인들을 억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지만
남편과 장남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던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1세는
패기롭게 프랑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고
무역 분쟁 명분을 얻은 나폴레옹은
주노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향하도록 했다
스페인은 당시 프랑스의 첫 동맹국이였다
근데 1805년 트라팔가 해전으로 해군이 싹 전멸당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서 얻을 이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이센이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일으키자
카를로스 4세의 측근이던 마누엘 고도이가
나폴레옹에 맞서기로 하는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프랑스가 예나 전투에서 대승리하고
한 달도 안되어 베를린을 점령해버리자
포고령을 단숨해 철회해버리고는
프랑스의 반꼬붕 상태가 되어버렸다
2. 포르투갈 침공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하며
군사통행권과 포르투갈 삼갈죽을 제안했다
북쪽은 토스카나에서 왕 노릇 했던
샤를 2세를 국왕으로 하는 북부 루시타니아 왕국
중간은 리스본을 포함해서 프랑스가 직접 통치
남쪽은 마누엘 고도이가 통치하는 알가르브 공국이였다
포르투갈은 이미 1801년에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에
영국과의 무역 문제로
나폴레옹에게 20일만에 쳐발린 적이 있었다
(오렌지 전쟁)
이렇게까지 개발린 이유는
바로 포르투갈군이 부패에 찌들어 있기 때문인데
군 장교들은 병력 수 만큼
급료와 보급품을 정부의 세금을 받아
보충하는 방식이였다
그러다 보니 돈에 눈먼 장교들은
병사 수를 부풀려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챙겼고
1807년 당시 공식적인 병력은 4만 8천명이였으나
실제 병영에 있는 군대는 2만명에 불과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국경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에
미쳐버린 어머니 대신에
섭정을 맡고 있던 주앙 6세는 뒤늦게나마
영국에 선전포고를 때리지만
11월 19일
주노가 이끄는 군대는 리스본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이에 11월 29일
주앙 6세는 가족과 귀족, 상인들을 데리고
식민지 브라질로 도망갔고
11월 30일
단 11일 만에
프랑스군은 총 한 발 안쏘고 리스본에 입성했다
포르투갈을 점령한 주노는
혼란한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려 노략했지만
나폴레옹은 이 반란분자들을 쥐어짜내라는 명령을 했고
가혹한 세금에 민심은 점점 악화되기에 이른다
3. 스페인과의 갈등
1808년 2월 9일
프랑스는 다짜고짜, 바르셀로나, 나바라, 카탈루냐의 요새를 점령한다
스페인은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스페인 내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국왕인 카를로스 4세와 측근 고도이에게도 불만이 커져갔는데
고도이는 원래 하급 귀족이였으나
왕과 왕비의 총애 덕에 높은 자리에 올라갔고
그것 때문에 귀족들의 시기를 많이 받았으며
퐁텐블로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가 거리낌없이 영토를 지나 간 것 때문에
일반 사람들까지도 불만을 품게했다
거기다가 트라팔가 해전으로 해군을 모두 상실하자
미국과의 무역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식량 부족과 산업에 악형향을 끼쳤다
결국 3월 17일
대중들은 고도이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체포하였고
카를로스 4세에게 그의 아들인, 페르난도 7세에게 양위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아예 지배할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불려 나가 감금되었고
스페인의 국왕은
나폴레옹의 친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로 돌아간다
(바욘의 퇴위)
4. 봉기
5월 2일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의 행패에 분개하며 봉기를 일으킨다
(도스 데 마요 봉기)
5월 3일
프랑스군이 스페인 곳곳의 봉기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맘루크 출신의 군인들까지 동원시키는 등
스페인 사람들에게 알안달루스의 향수 까지 불러일으켜 주었다
이러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주둔 병력만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아
프랑스는 8만명의 정규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에게 대항해
스페인도 민병대들이 대거 모아졌으며
프랑스는 이들을 거의 얕보고 있었으나
지리적 이점을 살린 민병대의 전술로 인해
프랑스군은 7월 말까지
2만 4천명이 전사하는
총제적인 난국이 벌어진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이 되는 요인 중 한 가지임
5. 나폴레옹의 친정
8월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 해방을 위해
존 무어 장군에게 3만명의 병력을 주고는
포르투갈에 입성하도록 했다
한편 프랑스
마드리드가 함락되어
자신의 형이 쫓겨났다는 사실과
영국군이 개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베리아로 진격한다
나폴레옹은 12월 1일 마드리드를 수복했고
나폴레옹의 개입과 스페인군이 탈탈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군은 해방이고 뭐고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지휘관 존 무어 장군이 포탄에 맞아 사망하는 등
영국군은 약 7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아무 소득 없이 영국으로 귀환했다
영국이 철수하는 것을 본
나폴레옹도 오스트리아가 이상한 기미를 보이자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간다
6. 중반기
이 이후는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1809년 1월
나폴레옹의 친정으로 전세를 다시 역전시켜
포르투갈을 재침공하여 다시 점령했으나
나폴레옹 카운터라고 불리는
아서 웰즐리가 등장하여
4월에 포르투갈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모아 놓고 때려봤자
탈탈 털리기만 하니
곳곳에 흩어져서
환장하게 만드는 게릴라 방식을 수행했고
프랑스는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스페인의 카디즈 해안 요새를 공격하지만
프로공성맨만 찍다가 2년만에 철수한다
프랑스는 지쳐갔다
주된 이유는 보급 탓이였는데
러시아가 지형과 날씨 때문에 보급이 힘들었디면
여기는 조용하다 하면 뛰쳐나오는 게릴라들 때문에
보급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베리아에 파견된 프랑스군이 35만이였지만
실제 전투 병력은 10만 언저리였고
나머지는 모두 보급을 위해 파견된 병사들이였다
7. 후반기
1812년 7월 22일
아서 웰즐리를 비롯한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동맹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대승리를 거둔다
(살라망카 전투)
물론 프랑스군도 조금씩 역습을 가하긴 하지만
(부르고스 공성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동부 유럽 친구들이 힘을 키우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병력들을 이베리아에서 철수시켜버린다
그리고 점차 상황은 나빠졌고
이베리아에서 프랑스군의 존재감은 옅어졌으며
저번에 소개했듯이
1813년 4월 13일
파리가 함락되고
나폴레옹이 퇴위하며
전쟁이 끝난다
스페인은 전쟁이 끝나면서
퇴위당한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즉위했고
이 전쟁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럽의 지도자들은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회담을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