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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

개성공단 2021. 7. 14. 14:53

1. 배경

때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흘렀다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리지엔을 먹는 데 성공했으나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프로이센과 달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되찾고

프로이센을 중세 유럽 수준의 공국으로 분해시켜 버리고자 했다

프랑스는 이전에는 프로이센과의 동맹국이였으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단독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바람에

적군의 공세가 모두 자신들에게 쏠리자 분개해 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믿을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자신들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면

네덜란드를 할양해주겠다며 프랑스를 끌어들인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와 북미의 식민지 때문에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 2세는 독일에 위치한 하노버의 국왕도 겸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자

하노버를 지키기 위해

적이였던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기로 한다

러시아는 전부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였고

전쟁으로 급부상한 프로이센에 적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였고

서로 방위 동맹을 체결하는 데 이른다

스웨덴은 이전에는 프로이센을 믿고

러시아에 쳐들어갔으나

오히려 러시아에 두들겨 맞고, 겨우 살아남는 과거가 있었다

 

프로이센은 도와주긴 커녕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으며 휴전해버렸고

러시아의 위협과, 프로이센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동맹에 들어간다

 

 

그렇게 프로이센은 동서남북으로 고립되는 처지에 놓였다

 

 

 

2. 개전

프랑스는 1754년 북미의 영국 식민지에 갑작스런 기습을 시작한다

영국은 급히 원군을 보내 프랑스를 저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함대의 절반이 침몰하는 개손해를 본다

프리드리히 2세는 북미에서의 전쟁을 보고받고

오스트리아의 슐리지엔 침공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작센을 기습한다

 

작센 침공은 세 가지의 이유가 있었는데

 

1. 앞서말한 예방전쟁

2. 작센의 자원을 약탈하여, 군대의 자금으로 사용

3. 작센을 발판으로 모라바, 보헤미아를 먹고, 빈까지 진격하여 전쟁을 끝냄

프로이센 군대는 1개월 만에 작센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영국은 동맹국인 자신들에게도

아무 말도 안하고 벌인 전쟁에 놀랐지만

곧 프로이센에게 많은 물자와 자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북미에서는 영국이 지는 반면

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이 우수한 상황이였다

 

 

3. 프로이센 포위망

 

프로이센은 계획한 대로

빠른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재빠르게 재정비를 마친 후였고

프라하를 포위하고, 굶어죽일 목적이였던 프로이센군은

곳곳에서 몰려들어오는 지원군에 결국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역은 남쪽만이 아니였다

일찍히 프로이센과 방위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7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보급 때문에 효율적인 공세는 할 수 없었지만

프로이센은 전선이 길어짐에 따라

보헤미아를 향한 계획은 일단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며

1만 7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의 포메라니아 침공에 가담했다

 

곳곳에서 포위해오는 적들을 본 프로이센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4. 버티는 프로이센

프랑스 또한 서부에서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침공하였으나

 

프로이센은 500명을 잃은 반면

연합군은 1만 명을 잃는 대패를 겪는다

(로스바흐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로 인해

이후의 서부 전역에서도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게 끝이 아니였다

프로이센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2배나 많은 병사를 가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로이텐 전투)

그리고 러시아가 보급 문제로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깨달은

프리드리히 2세는 곧장 스웨덴군을 향한 공격으로

그들이 점유하고 있던 포메라이나 지역에서 몰아는 데 성공한다

한편 영국은 북미에서 계속되는 패배를 겪고 있었으나

정작 본국에서는 기습적인 전쟁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연립 정부를 만들었고

각 자의 전략을 모두 취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하나는 하노버에서 방어만 하는 니가와 전략

나머지 하나는 해군력을 이용한

프랑스가 보유한 식민지를 장악하는 것이였다

 

이것은 프랑스가 유럽 전선에서 상당히 애를 먹는 결과를 낳게 해준다

이 와중에

안드라스 하디크라는 오스트리아의 장군

후사르 전술을 이용해

프로이센군을 우회하고

하룻밤 동안,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을 점령한다(!)

 

이 소식에 놀란 프리드리히 2세는 급히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오스트리아로 귀환한 후였다

 

 

5. 계속되는 전쟁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먼저 선빵을 쳤으나

양측 모두 소모전만 계속한 끝에 무승부로 끝나고 만다

(양측 모두 자기가 이겼다고 주장)

스웨덴은 계속되는 프로이센의 공세를 막아냈으나

자신들도 피해가 막심했던지

베를린을 향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멈춘다

오스트리아는 작센을 재탈환하기 위한 기습적인 전투를 감행하고

프로이센군은 많은 수의 대포를 잃는 등

궤멸의 위기에 몰렸으나

 

주위의 울창한 숲 지형 덕분에

프로이센군은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은 다가오는 겨울 때문에 더 이상의 추격을 할 수 없었다

 

 

6. 프로이센의 위기

계속되는 승리로 인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개병신 군대로 얕본

프리드리히 2세는 쿠너스도르프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 전투로 인해 절반의 병력이 죽거나 다쳤으며

모조리 흩어져버리는 대참사를 맞이해버린다

(프리드리히 2세 본인도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함)

1761년 프로이센의 상황은 절망적이였다

가용 병력은 10만명이였으나

 그 중 상당수가 신병에 불과했으며

계속되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계 공격에 지쳐있던 것이였다

그리고 콜베르크가 러시아에게 무너지면서 위기는 닥쳐왔다

육상에서 보급이 불안정했던 러시아였지만

해상을 접수한 이상, 보급을 안정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었고

프로이센 국내에서도 자신들이 전쟁에서 졌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영국 놈들도 이젠 지쳤다며

대충 양보하고 전쟁 끝내라는 제안 같은 협박을 했고

(돈 안 줄거라고 협박함)

 

 

남은 군대는 6만여 명...

베를린 주위로 몰려드는 적군...

여기서 이젠 희망이고 뭐고 다 틀렸다는 프리드리히 2세였으나

1762년 1월 5일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표트르 3세가 즉위한다

 

 

7. 동맹의 배신

지난날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당시

노빠꾸로 슐리지엔을 침공했던

프리드리히 2세를 본 표트르 3세는 그의 빠돌이가 되어버렸고

 

러시아의 철수는 물론이고

프로이센에게 군대까지 보내주는

희대의 개손해 조약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한다

러시아가 이탈해버리니, 스웨덴도 이탈하고

한숨 돌린 프로이센군은 병력을 12만까지 충원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 작센을 빼앗는다

프랑스 또한 잇다른 서부전선에서의 실패

뉴펀들랜드에서 해군이 괴멸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더 이상의 전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며

강화 협상을 추친하고, 전쟁에서 이탈한다

그 이후로

약 1년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교착 상태가 계속됬으나

서로가 모두 피폐해져 있었고

더 이상의 전쟁에는 아무 이득도 없다는 이해관계가 겹쳐

 

오스트리아의 프로이센 슐리지엔 영유권 인정

프로이센은 점령한 작센을 다시 반환

 

그렇게 7년 전쟁은 끝난다

 

 

8. 결말

오스트리아는 슐리지엔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졌음에도, 영토를 빼앗기거나 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그 동안 유럽의 환자 취급받던 오스트리아

장기적으로 버티면서

높은 인식을 거두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프로이센도 결과적으로는 얻은 게 없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다굴을 맞으면서 버텼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이상 프로이센을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만들게 했다

 

다만, 많은 재정적인 소모로 인해

한동안 프로이센은 군대를 원상복귀 시킬 수 없었고

이것은 나중에 일어날 프랑스 혁명전쟁의 패배의 원인으로 나오게 된다

러시아는 다 이긴 전쟁을 웬 병신 하나 때문에 다 쳐 말아먹는다

표트르 3세는 몇 달 후에 부인이였던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로 실각당했고

며칠만에 의문사 당한다

 

그러나 몇 가지의 이점도 있었는데

1. 우선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거했고

2. 프로이센의 군대와 맞섬으로써, 유럽에서의 위상 향상

3. 보급 문제를 체험함으로써, 병참부의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이 위기를 이겨내고자 했고

이런 대책은 향후 13개 주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나라는 프랑스였다

우선 영국에게 인도와 아메리카 지역을 거의 다 넘겨준게 너무나도 컸고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전쟁 참여 대가로 네덜란드를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런 개막장스러운 재정 상황은 계속 이어지다가

단두대 혁명을 촉발시키게 되는데...

 

 

과연 유럽은 또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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