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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개성공단 2021. 7. 30. 11:12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개판 5분전

1774년 루이 16세

할아버지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는 1765년에 결핵으로 사망)

루이 16세는 즉위 이후

프랑스가 맞이한 심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문제였는데

 

귀족들이 농민을 착취하니

농민들은 생활이 어려워, 도시로 노동자가 되기 위해 나가버렸고

농민들은 점점 줄어드니, 농작물의 생산량은 급감

생산물이 급갑하니,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그대로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이였다

대강 이런 상황에 이르렀으면

기득권층을 이루는 귀족들이 어떻게든 대책을 내놓아했지만

그들 태반이 나태하고 낙관적인지라

이 문제를 신경쓰는 자는 거의 없었다

루이 16세도 이런 위기를 인식은 하고는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면, 바로 물러나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것을 지켜보는 하류층들은...

 

2. 삼부회

삼부회 프랑스의 세 종류의 신분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이 모여

프랑스의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회의 같은 것이였다

 

1302년 필리프 4세에 처음 개최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전제군주제가 확립된 1614년부터

약 170여년간 열리지 않았었다

본래 삼부회 구성원은

각 신분이 동등한 의회를 배정받도록 되있었으나

인구의 95%를 차지하던 평민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며

다른 신분보다 2배정도 배정받을 수 있게 요구했고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수락해버린다

그렇게 1789년

프랑스 전역에서 1:1:2의 비율로 1200명이 선출되었고

삼부회가 개막했다

오래간만에 열린 삼부회는 시작부터 파행을 맞이한다

이유는 표결에 관한 문제였는데

 

원래는 각 신분별로 1표 씩을 행사하는 거였지만

그럴 경우 2대1로 평민이 불리했고

 

제3신분이 원한 것은 각각의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는 거였지만

제1,2신분에서도 제3신분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어

절대적으로 평민에게 유리한 것이였다

 

그렇게 서로의 의견차가 좁히지 않은 채

삼부회는 그냥 엎어지고 만다

인구의 9할을 차지하던 제3신분

삼부회가 의미 없게 끝나버리자

자신들만이 국민들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것이라며

국민의회를 창설한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프랑스의 재무장관이였던 자크 네케르

이러한 사태에 크게 우려하며

왕실과 국민회의의 화해를 주선하고

영국의 의회처럼 1,2,3 신분을 통합하는 행복회로를 돌렸으나

그 딴거 없이 루이 16세에게 해임당했고

 

3신분에 호의적이였던 자크의 해임

평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프랑스 혁명

네케르의 해임에

자신들까지도 위협을 당할 것 같아보인 평민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감옥 겸 요새로 사용되었던 바스티유를 습격한다

시민들의 바스티유 습격에 놀란 루이 16세

국민위병 사령관인 라파예트 장 실뱅 바이

새로운 행정 기구인 파리 코뮌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파리를 방문한다

 

루이는 이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아버지이자, 자유주의자의 왕

루이 16세로 환영받았다

새로 탄생한 국민제헌회의는

봉건제나 십일조 등을 폐지하는

8월 칙령을 통과한다

 

삼부회 소집 이후

고작 몇 개월 만에

구 체제의 핵심 제도가 모두 무너진 것이였다

이처럼 혁명은 매우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도시 밖의 시골 지역에서는 대공포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혁명으로 인해, 불안이 가중되자

귀족들이 일부러 농민들을 굶겨죽이려고 한다거나

군대가 동원되고 있다거나

도적떼들이 몰려다닌다거나 하는 등의 괴소문이 퍼졌던 탓이였다

 

이러다보니 농민들은 무장한 채

영주나 성직자의 집을 습격했고

당연히 농사는 제대로 짓지 못해버렸으며

 

중세시대 마냥 소규모 지역의 소요사태가 아닌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식량 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 키워버리고 만다

이 와중에

라파예트는 미국 독립 선언서의 영향을 받은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유럽 대륙 최초의 인권 선언이였으나

몇몇 단어의 문제로 인해 나중에 문제를 제대로 키우게 된다

그 다음은 프랑스의 정부 체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보수주의자들은 거부권을 가진 국왕이 임명한 상원이 포함된 양원제를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원제 일시적인 거부권을 가진 국왕을 주장했다

(일시적인 거부권이란, 법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것)

가관인 것은 시민권 문제였는데

 

파리 코뮌은 노동을 하는 25세 이상의 프랑스 남성만을

정치적 권리를 가진 능동적인 시민

 

그 밖의 나머지 시민은 권리가 제한된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했다

 

본격 느그식 평등

 

 

4. 베르사유 행진

대공포로 인한 농민들의 혼란

그리고 끝없는 정치 및 사회적인 문제가 겹쳐

시민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1789년 10월 5일

많은 여성들이 부엌칼 같은 무기를 들고

곳곳의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고

주위의 남성들까지도 이에 환호하고 참여 하며

같이 파리 시청을 털어버린다

하지만 시위대의 목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이것은 로비에스피에르 같은 혁명가들의 의견이 결부되어 이었는데

바로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왕과 왕비를 파리로 데려오는 것

 

대략 두 가지의 사유가 있는데

우리는 모두 평등하니

왕을 비롯한 귀족들도 민중과 함께 파리에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다음으로

국왕이 어디선가 군대를 데려와서

자신들을 다 쓸어버릴지도 모르기에

파리에 두어 감시해야 한다는 명분 탓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파예트의 휘하에 있던

1만 5천명의 군대까지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고

라파예트는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애썼으나

그들이 모두 탈영할 것을 우려해, 같이 가기로 한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쳐들어 온 군중들이였으나

루이 16세는 자신의 방에서 그들과 접견

식량과 같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겠다는 대답을 받은

만족한 군중들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군중들은 다시 궁전으로 쳐들어가는데

이왕 온김에 왕비를 잡아 족치자는 것(!)

 

당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별로 안좋은 소문이 돌고 있었고

우리가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은 모두 그녀 탓이라는 것이였다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때 소개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동생이였다

경비병도 여러 명 살해당하고

그렇게 왕비는 잡혀서 살해당하는 듯 했으나

라파예트의 필사적인 시간 끌기와

왕과 왕비의 카리스마 덕에

군중들은 대강 해산에 이를 수 있었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귀족은

시위대의 요구 하에 파리의 튀일리 궁으로 들어갔고

사실상의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8월 칙령과 권리 선언문을 수락한

루이는 입헌 군주제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의 공식적인 칭호는

프랑스의 왕(King of France)에서

프랑스인의 왕(King of the French)으로 바뀐다

루이 16세는 쓸쓸한 표정으로

영국의 옛 국왕이였던

찰스 1세의 역사가 담긴

책을 도서관에서 가져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과연 이 호붕이의 미래는?

(소설 연재판에서 역사겜을 약 1000시간 정도 했다고 함)

(소설 연재판에서 게임 이름이 Hard Of Blow Force, 근세에서 현대까지

경제와 군사적인 면을 세세하게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빅토리아 + 하츠 오브 아이언 인듯)

(소설 연재판에서 게임 시작 설정에서 비역사적 AI 켜놨다고 함)

 

 

 

프랑스 혁명 왤케 어렵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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