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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개성공단 2021. 7. 14. 14:54

1. 프리뷰

1740년 10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한다

그에겐 자녀가 아들 하나, 딸 셋이 있었으나

아들이 일찍 요절해버리는 바람에

(후술할 제도로) 후계자는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근데 갑자기 카를 알브레히트라는 자가

자신이야말로 적법한 후계자라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2. 여성의 상속 문제

기원후 500년 경 만들어진

프랑크의 살리카 법에 의하면

여성은 본래 왕위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

1703년

당시의 황제는 레오폴트 1세였는데

(벨기에 왕국 말고)

레오폴트 1세가 1705년에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요제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을 얻지 못했고

딸 두명을 남긴다

(이 친구도 아들을 낳긴 했지만, 1년 만에 수두증으로 죽는다)

1701년

스페인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왕위를 상속받게 된다

1703년

스페인의 계승 분쟁을 목격한 요제프 1세는

자신들 또한 왕위 문제로 시끄러워 질 것을 염려하며

 

자신과 동생 사이에 아들이 없을 경우

형의 딸이 동생의 딸보다 우선권을 가진다는

상호 승계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요제프 1세는 두 딸만을 남긴채, 1711년 사망하고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이자, 요제프 1세의 동생이였던

카를 6세가 즉위한다

카를 6세는 왕위를 이어받은 후

자신의 형과 맺은 상호 승계 협정을 공개한다

(1713년의 국사 조칙)

 

이것은 자신의 사후

여자도 오스트리아는 물론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밀라노, 나폴리, 샤르데나, 네덜란드를

상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1716년에 자신의 장남이 태어났으나

얼마 만에 사망했기에

이대로라면, 자신의 조카가 상속을 받는 것이 십상이였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구상을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형과 맺었던 협정을 공개하면서

형의 딸을 우선시했던 것과는 달리

통치자의 딸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말을 바꾸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딸이 없다면, 누이 그리고 고모 순으로

가문을 이어받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해버린 것이였다

 

 

3. 무능한 왕

황실의 고위 관리였던

사보이의 외젠 공작은 국력을 강하게 키울 것을 주장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두 번의 전쟁을 벌이고, 이기지도 못했기 때문에

재정은 파탄났고, 군대도 거의 그지 같이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그는 후계 문제도 지적했다

주위의 나라들에게서 동의를 얻어내긴 했지만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언제 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였다

하지만 카를 6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무역 회사 중단을 대가로 수락했고

프랑스는 로렌을 내주는 대가로 수락했기 때문이였다

 

바게트 놈을 믿을 줄이야

카를 6세는 국사 조칙을 발표할 때, 아직 자녀가 없었다

사실 이 양반이 정말 후계자에 여자를 세우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냥 일종의 보험격으로 만들어 뒀던 것이다

 

자신의 장남이 일찍 요절해버리고

장녀 테레지아가 점점 성년이 다가오는데도

아들이 생길거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는

테레지아에게 황제에 관한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일어난 전쟁 때

테레지아가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 된다

이 와중에

요제프 1세의 차녀, 마리아 아말리아는 시집을 가는데

그녀의 남편이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였다

그리고 1740년

카를 6세가 독버섯을 잘못 먹고 사망한다

 

 

4. 슐레지엔 문제

브리그 공국은 슐레지엔 지방에 있던 나라로

통치 왕조였던 피아스트 왕조의 대가 끊길 경우

자동적으로 브란덴부르크에 합병되기로 했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보헤미아의 욍, 페르디난트 1세가 대놓고 씹는 바람에

발효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조약을 들고 와서는

자신이 국사 조칙을 수락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는 슐리지엔 양도를 제안하지만

거부당한 프로이센은 전쟁을 준비하기로 한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비롯한 부르봉 왕조

네덜란드의 오스트리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고

 

나폴리 왕국도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해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 전쟁을 준비한다

외부적인 요인 말고도, 내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요제프 1세의 딸과 결혼한 카를 알브레히트는 여성은 상속권을 얻을 수 없다며

자신이야말로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국사 조칙을 거부하며,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 반기를 일으킨다

 

 

5. 제1차 슐레지엔 전쟁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슐레지엔 지방을 침공한다

 

오스트리아군보다 우수했던 프로이센군은

빠르게 슐레지엔 지방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에 프랑스까지 참전한 것을 목격하고

병신같은 상태의 오스트리아라면 해볼만 하다며

프랑스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장악한 후

자신을 카를 7세라고 칭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임을 선포했다

기습적인 침략으로

승기를 잡은 프로이센이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재정비를 시작하며, 프랑스군을 격퇴했고

프로이센 또한 피해가 점점 막심해지자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방을 양도받는 대가로, 휴전 조약을 체결한다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던 카를 7세

프로이센의 휴전으로 인해, 1년 만에 보헤미아 지방을 모두 빼앗겼으며

바이에른에 틀어 박힌 채,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신세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겸으로

프랑스의 오랜 앙숙인, 영국이 오스트리아의 편으로 참전한다

 

영국의 개입으로 인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제대로 된 공세 조차 하지 못하고, 전세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6. 제2차 슐레지엔 전쟁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승승장구하자

그들에 대한 위협을 느끼며

휴전을 깨고 다시 전쟁을 선포한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을 침공하고자

해전으로 영국 전함도 부숴나갔지만

많은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한 장관진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프랑스는 대신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쳐부수기 위해 진군했고

당시 영국과 하노버, 오스트리아 사이의 분열로 인해

프랑스는 손쉽게 네덜란드 일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1745년, 카를 7세가 통풍으로 고생하다가

황제 노릇은 하지도 못한 채, 사망한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앙은 아버지를 이어

오스트리아를 막기 위해 고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작센까지 오스트리아의 편으로 참전하자

프로이센의 상황은 너무나도 악화되어버린다

결국 막시밀리아은 퓌센 조약을 체결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랑수아 에티엔을 황제로 선출하는 데

동의하고 평화를 맺는다

프로이센은 고립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작센군을 크게 이겨냈지만

양측의 교착상태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2차 슐레지엔 전의 상태로 현상유지 한다는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낸다

 

 

7. 결말

이후로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양 세력 모두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다가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평화를 맺는다

모든 서명국은 국사 조칙을 승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일부분을 포기하고

철수하거나, 샤르데나와 스페인에게 양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철수

스페인은 영국의 노예 매매 계약 갱신

오스트리아의 프로이센 슐레지엔 영유권 인정으로 전쟁이 끝난다

그러나 이 평화 조약은

프로이센을 제외하고는 만족하지 못했는데

자신들이 퍼부은 노력과는 다르게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이것은 7년 뒤의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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