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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2)

개성공단 2021. 7. 30. 11:13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0. 오류 수정

저번에 바스티유 습격을 너무 간략하게 설명해서

어떤 분이 댓글로 자세하게 써주심

제3신분에 호의적이였던

네케르의 파면

군중에게 분노를 확산시킨 것은 맞음

 

덤으로 높으신 분들은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깔아뭉개고자 함

프랑스의 언론인이였던

카미유 데믈랭이 스위스인들과 독일인들이

자신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파리의 군중들을 선동함

당시 파리를 수비하는 정규군의 절반

스위스와 독일을 출신으로 하는 외국계 군인들이였음

시위는 네케르의 해임에 항의하는 표시로

네커의 흉상을 들고 벙돔 광장을 행진했고

 

진행 과정에서

기병 연대와 충돌하며 유혈사태가 발생

식량을 비롯한 많은 물품의 물가는 하락 조짐을 보이지 않았고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세관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약탈

 

심지어 무기고까지 털리는 바람에

무기들이 반출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립 군대는 이 소란을 안정시키는 데

아무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 근위대는 당시 파리 시민들과 유대감을 쌓고 있었고

외국 용병 애용과 가혹한 프로이센식 규율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버림

그렇게 시위대는 훈련된 군대를 얻는다

 

대충 이런 상황에 이르렀으면

남은 외국계 용병들로도 잘 활용을 했어야 했는데

지휘관들은 용병들에게도 의심을 품고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개병신 같은 정부 + 그들에게 불만을 품은 군중

이 두 개의 요소가 합쳐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요저번에 너무 간단하게 쓴 탓에

이런 지적을 해 주신 것 같다

다음으로 시민권

능동적인 시민 노동을 하는 25세 이상의 프랑스 남성만이라고 기재했었는데

오류고, 어느 정도의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25세 이상의 남성이 조건이다

이들은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법과 정치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며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졌다

 

반대로 열심히 일해도 세금 납부하기 힘든

문맹이 다수 포진해 있는 가난한 자들이나

남성을 제외한 모든 여성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는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다

 

아무튼 우덜식 평등인건 변하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칭호가

프랑스의 왕(King of France)에서

프랑스인의 왕(King of the French)으로 바뀐 의미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주관적인 내 추측으로는

프랑스에서 전권을 휘두른 전제군주제의 국왕

이제는 의회의 손에 이끌리게 된 입헌군주제의 국왕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1. 혼란의 프랑스

아무튼 각설하고

베르사유 행진으로 파리의 포로가 된 루이 16세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의회를 창설한 혁명가들은

본격적인 갖가지 문제들을 맞이한다

의회는 저번에 소개한 8월 법령으로

그 동안 민중을 등쳐먹던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의 거의 모든 자산을 압류했는데 (수도원도 해산)

 

1790년 7월에는 성직자법을 통과하여

교회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

 

이에 대해 많은 종교인들이 반대했으나

모두 추방되거나, 단두대에 죽임을 당한다

의회는 여러 정파로 인해 분열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군주제를 옹호하는 무니에의 군주주의파

라파예트와 시에예스를 비롯한 입헌파

두포트, 바르나브, 빅터, 3인이 모인 온건파

남성 우월주의인 카잘라세와, 카톨릭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리

 

그리고 앞으로 단두대 릴레이를 열게 되는

로비에스피에르와 마리 같은 급진파들이 모여

개판을 형성한다

1971년 6월에는 생활이 어려운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는 시위를 하자

이것을 평등에 대해 위협으로 본 의원들이

길드와 노조 같은 조직 결성 금지와

파업을 금지하는 샤펠리에 법을 통과한다

 

(우리의 평등은 어디에?)

파리 바깥에서는 군대의 반란이 터진다

다만, 왕당파의 쿠데타가 아니라 평민 출신의 군사들이 일으킨 것

(낭시 사건)

 

혁명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 출신은 고급 장교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미 고급 장교 자리에 귀족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하급 장교들은 자코뱅 같은 급진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킨다

 

부이예 장군이 이들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제헌의회의 다수는 그의 반란 진압 성과에 축하를 보냈지만

자코뱅 같은 급진파는 진압 방식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많은 장교나 병사가 군에서 이탈했고

혼란기에 법과 질서를 수호할 군이 약해지니

점점 프랑스는 혼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2. 국왕의 도주

1791년 2월

수 백명의 왕당파 귀족들이 왕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라파예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모두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단검의 날)

 

루이 16세는 이 시위의 진압에 대한 배신감과

갇혀 지내기만 하는 불만이 쌓이고 쌓여

파리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마차도 눈에 띄는 커다랗고 느린 마차를 사용했고

거의 대놓고 '이거 국왕의 행차' 수준으로 움직인지라

왕과 그의 가족은 바렌 마을에서 체포되어버린다

(바렌 사건)

루이 16세는 다시 튈리안 궁에 재감금 되었고

프랑스에서 왕에 대한 인기는 급추락 했으며

왕정을 폐지하자는 공화주의 운동이 등장했다

라파예트는 왕이 도망이 아니라

납치를 당했다고 개드립을 쳤고

 

공화주의에 대한 시위가 번지자

라파예트는 군대를 동원한 진압으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샹 드 마르스의 학살)

 

3. 군주의 몰락

루이 16세는 갇혀지내면서도

법의 통과에 대해 계속 거부권을 행사하는 패기를 부린다

 

도망도 실패했으면

좀 닥치고 지내야 할 왕이 저러고 있으니

자코뱅을 비롯한 급진파는 군주제를 엎어버리자는 주장이 거세졌다

1792년 4월

1차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한다

 

초반 전쟁의 삽질

전쟁을 위한 법을 통과해야 했으나

루이 16세의 거부권으로 무산된다

6월 20일, 급진파는 궁전을 습격했으나

패기 넘치는 루이의 온갖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

 

입헌파였던 라파예트는 거부권만 행사하지 않는다면

국왕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를 불신했던 루이 16세는 단칼에 거절했고

이것은 왕정 폐지에 대한 국민의 여론이 단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8월 10일, 튈리안 궁이 공격당했고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실은 탕플 탑으로 유배되었다

(8월 10일 사건)

 

로비에스피에르를 비롯한 급진파는

입법의회를 국민공회라는 명칭으로 변경하고

 

9월 21일에 왕정을 폐지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선포했다

9월 2일에는 9월 학살 사건이 터진다

조르주 당통이라는 작자가 파리에 감옥에 있던 거의 모든 죄수들

반혁명 분자로 몰아서 잔혹하게 죽인 것이였다

 

당통 이 새끼도 나중에 단두대에서 뒤진다

 

 

4. 단두대 엔딩

제1공화국이 선포되고

1792년 12월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을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재판은 20일 동안 치뤄졌으며

 

1793년 1월 14일, 다수결로 국왕에게 유죄를 선언했고

1월 16일, 마찬가지로 다수결을 통해 국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단두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동년 10월 16일에 단두대에서 죽임을 당한다

혐의는 사치, 국고 낭비, 학살 그리고... 근친상간이였다

 

현재, 근친상간은 혐의가 주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루이 16세의 후계자

루이 17세도 1795년, 감옥에서 옥사하면서

샤를 10세가 왕정 복고를 일으킬 때까지

부르봉 왕조는 종말을 고한 것 처럼 보였다

 

 

 

 

 

왕정을 폐지한 프랑스 공화국은

혁명에 놀란 유럽의 군주들로부터

국가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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