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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3)

개성공단 2021. 7. 30. 11:14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국민공회

군중들이 왕궁으로 쳐들어간

8월 10일 사건으로

프랑스의 왕정은 끝을 맺고

프랑스 최초의 공화제가 등장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군주제가 없는 새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새로운 선거를 열고, 입법의회를 국민공회라는 명칭으로 변경한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에 대한 처벌을 논의한다

 

산악파는 처형을 주장하지만

지롱딘파는 낮은 처벌 또는 추방을 주장하며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결국 투표를 진행해

루이 16세는 사형에 대한

과반수의 표를 얻어 단두대에서 칼 맞고 죽는다

 

2. 지롱딘파와 산악파

자코뱅을 쉽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반왕당파 계열의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임이였다

 

하지만 혁명이 터지고, 권력을 잡고난 이후

국가의 방향에 대한 사상이 서로 달라 분열되기 시작했고

그게 나타난 것이 대표적으로 지롱딘파와 산악파였다

산악파 자코뱅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력이였고

주요 인물로는 로베스피에르, 자크 에베르, 당통 등이 있었으며

국민공회의 왼쪽에 앉아서

이들을 좌파라고 불렀다

지롱딘파 자코뱅에서 온건파로 분류되었고

당연히 급진파인 산악파와 매우 대립했다

 

(지롱딘파는 당시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였고

나중에 19세기에 온건파들을 호칭할 때 만들어진 단어임)

 

국민공회의 오른쪽에 앉아서 이들을 우파라고 불렀다

(물론 이들의 성향이 우파라고는 볼 수 없다

좋게 말하면 중도좌파라고 부를 수도?)

 

3. 지롱딘의 몰락

산악파의 조르주 당통

반혁명 분자들이 파리 곳곳에 숨어 있다며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죄다 학살하는 사건을 벌이는데

(9월 대학살)

 

지롱딘파는 산악파를 위험한 세력으로 보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지롱딘은 산악파가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독재를 할 것이라고 믿었고

산악파는 지롱딘이 왕당파와 협조하는 반동분자라고 믿었다

 

그렇게 양측의 다툼은 점점 번지며

국민공회에서 토론은 커녕

말싸움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에 샤를 뒤믈리에의 쿠데타 사건이 터진다

라파예트의 후임으로 들어온 양반이였는데

혁명 전쟁에서의 성과가 별로 없자

산악파의 비판을 받았고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전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였다

 

그는 외국으로 망명했고

지롱딘파와 어울려 지냈기에

지롱딘은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아예 봉기가 일어난다

(방데 반란)

 

기존의 성직자들이 재산 갈취에 이어

징병까지 당하자, 분노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였다

 

그런데도 의회는 아직도 서로 아가리 대결만 벌이고 있으니

시민들은 이 답답한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지롱딘파의 제명과 체포를 요구하며

국민공회로 쳐들어갔고

(1793년 5월 31일~6월 2일 봉기)

수 만여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의회를 둘러싼 끝에

31명의 의원들이 체포되었으며

지롱딘파는 완전히 실각한다

 

(이 중 22명이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됨)

 

 

4. 산악파 체제

지롱딘파를 몰아낸 산악파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한다

(1793년 헌법)

 

우리도 잘 아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국민주권)

남성 한정 보통선거, 노동권, 부의 재분배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으로 찬성 표를 얻어 채택되었으나

 

혁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제한 연기된다

산악파는 파리만 무사하면 

프랑스의 미래가 밝다는 개논리로

지방에 대해 아무런 조취를 치하지 않는데

 

이는 지방의 농민과 숨어지내던 지롱딘파의 합세로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됬으며

대규모 유혈 사태와 후술할 대참극이 발생하게 된다

7월 13일에는 지롱딘에 옹호적이던 샤를로트 코르테

산악파의 정신적 지주인 장 폴 마라를 암살한다

 

 

 

5. 공포정치

마라까지 암살을 당하자

의회를 완전히 접수한 산악파는 인정 사정 봐줄게 없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해보이는 것들이라면

단두대의 위력을 맛 보여줘야 했다

9월 17일에는 피의자 법이 통과되었다

 

정부가 공언한 혁명의 적이나

적으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의 체포를 명령한 법이였다

 

그러니까 물증말고 뇌피셜만으로도 충분히 체포가 가능했다

아까 말한 대규모 참극이 터지는데

상술한 성직자들의 반란으로 인해

1793년 11월, 장 밥티스트 캐리어라는 양반이

의심이 가는 성직자와 수녀 4천명을 

낭트 바다에 던져 익사시켜버린다

공포정치와 계속되는 학살로 인해

산악파도 분열이 시작되었다

 

일단 1타로 자크 에베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통수를 준비하다가

조르주 당통에게 통수를 맞고

1794년 3월 24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 조르주 당통

뇌물 수수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4월 5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이제 누가 로베스피에르를 막을 수 있을까?

6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강화 수단으로

프레리알 22일 법을 통과시키는데

이것은 기존의 사법 절차를 간략화한 것이였다

 

반혁명적인 사람으로 의심이 가서 체포가 된다면

피고인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으며

심증적인 증거만으로도 채택이 되며

배심원단은 그 증거와 피고의 자기 변호만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며

그 판단은 오직 무죄 또는 사형만 내릴 수 있었다

 

이 법으로 하루에 사형이 22건이나 집행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당연히 로베스피에르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6.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로베스피에르 정부는 종교도 만들어내는 막장성도 있었는데

가톨릭 탄압으로 인해 국교가 없자

최고 존재의 제전이라는 우주를 숭배하는 종교도 만들어낸다(...)

대중들은 이런 공포 정치에 대한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암살 사건도 두 번이나 일어났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국민공회에 왔으나

반-로베스피에르 파의 기습 공격과 함께

자코뱅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면서

7월 27일 그는 체포되고 만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그리고 다음날 7월 28일

곧바로 처형되면서

그도 결국 자신이 죽인 국왕과 같은 처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7. 테르미도르의 집권

로베스피에르를 몰아낸 테르미도르는 공포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많은 악법을 없앴고, 자코뱅도 축출시켰다

 

그리고 혁명 정부 내내 이어져오던

가격 통제를 없애버렸는데

중농주의 학파의 의견에 따라

가격 통제를 없앤다면

알아서 물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경제는 좆망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은 물론이고, 지폐는 휴지가 되었다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분노한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다시 봉기를 벌이기까지 한다

(제르미널 12일 반란)

당연히 이러니 테르미도르의 인기는 낮았고

선거에서 패배를 직감한 그들은

새로 만드는 헌법에서(공화력 3년 헌법)

새로 선출되는 2/3은 국민공회 출신이여한다는 삼분법을 넣는다

개막장 선거와 농민들의 분란

그리고 기타 등등의 사유가 겹쳐

왕당파 무리들이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파리에서 봉기했다

(방데미에르 13일 반란)

 

 

숫자가 5배나 차이나는 탓에 공화정부는 패배를 직감했으나

이 친구가 등장하면서 

왕당파를 향한 효과적인 진압 방식으로

공화정부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앞서말한 공화력 3년 헌법으로

5명의 총재에게 행정권을 맡기는

총재정부가 등장했다

 

과연 이 정부는 프랑스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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