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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난 전쟁

개성공단 2022. 2. 10. 12:34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정한론

메이지 유신으로 촉발된 국가의 현대화는

사무라이 계급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권리를 박탈시켰고

폐번치현 등, 각종 거대한 변화는

사무라이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1868년 

조선과의 외교 사건이 터지는데

 

원래는 조선에서 승인한 도장을 사용해야 했지만

메이지 천황의 도장이 있었고

이에 조선은 일본의 국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국서 거부 사건)

 

1871년에는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으로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과도 대등하게 가려 했지만

 

당시 쇄국 정책을 고집하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던

조선이기에 아무 변화는 없었다

사무라이와 불만, 조선과의 외교 문제

 

이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들에게 모욕을 준 조선을 정벌해야 하고

조선 원정 시, 지위를 잃은 사무라이들에게 일거리를 줄 수 있다 주장했다

하지만 해외로 순방을 나가 있었던

이와쿠라 사절단과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의 계획에 반대했는데

유럽과 미국을 갔다오면서, 내치가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아직 일본이 근대화가 진행중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 원정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을 들어

정한론은 기각되버린다

(메이지 6년 정변)

정한론이 기각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 가고시마에 사학교라는 학원을 세웠고

 

겉으로는 중국 고전을 가르치면서도

모든 학생들에게 무기 훈련과 전술 교육을 시켰다

 

총 132개가 세워진 이 학원의 학생들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병들로 키워지고 있던 것이였다

(심지어 포병 학교도 세운다)

 

 

2. 사무라이의 불만

1874년 

메이지 신정부는 전국적인 징병을 실시하여

사무라이를 군에서 배제시켰고

 

1876년

공공의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사무라이가 칼을 차는 것을 금지시키는 폐도령도 내린다

이런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사가의 난(1874년), 하기의 난, 아카즈키의 난, 신푸렌의 난(1876년) 

몇 차례 무사들의 크고 작은 소요 사태가 벌어진다

1876년 12월

뒤이어 '사이고 다카모리 암살 계획 사건'이 터진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놈이 있길래 붙잡아서 고문했더니

 

주동자격인 나카하라가 정부에서 보낸 밀정이였다는 것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러 왔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는 사무라이들에게

"사이고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란을 일으켜야 해!"

...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는

정말 나카모리가 정부가 보낸 밀정인지

아니면 사이고 파벌이 만든 가짜인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1877년 1월

메이지 정부는 가고시마에 많은 무기와 탄약이 비축된 것을 확인하고

이것들을 죄다 압수한 후, 오사카에 옮기려고 했으며

 

녹봉이 사라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사무라이는 눈이 돌아간 나머지, 정부관리를 공격하고 무기를 되찾아온다

1월 29일

정부관리에 대한 습격으로

이미 가고시마는 반란군이 되어 있었고

 

정부는 가고시마에 대한 군을 파견하기로 결정

 

일본사 최후의 내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한다

 

 

 

3. 전쟁

11

반란군은 구마모토 성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은 전문적인 병사들인 사무라이와는 다르게

농민들로 구성된 징집군이 상당히 비효율적일 것으로 여겨

얼마안가 이 성이 무너질 것으로 여겼으나

 

적은 숫자인데다가 지원도 얼마 받지 못함에도

사령관 다니 다데키는 악착같이 버텼으며

반란군은 포위 57일만에 성을 포기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구마모토성 전투)

구마모토 공성전과 동시에 타바루자카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구마모토성을 지원하기 위한

신정부군의 공세와 이를 막기위한 반란군의 양상이였다

 

전투는 팽팽히 지속되었으나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반란군의 보급이 끊겨버렸고

총구에 물이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전력이 약화되자

이 전투는 반란군의 패배로 끝난다

(타바루자카 전투)

 

참고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 전투로 오른팔을 잃었다

9월 24일

구마모토 공성전과 타바루자카 전투로

병사들을 죄다 말아먹은 반란군은

가고시마에 틀어박혔고

 

최후의 순간에는 500명의 병사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이고는 항복을 거부했고, 할복 자살로 생을 마친다

(시로야마 전투)

 

가고시마가 함락되며, 전쟁은 불과 8개월만에 끝나고 만다

일본은 이 전쟁에 엄청난 비용을 들였는데

1년 예산 중에 90퍼센트를 쓸 정도였다

 

정부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폐를 찍어냈고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농민들이 빚을 감당하지 못해 땅을 팔고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었고

그 결과 대지주가 자본을 축적하여 재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빈부격차는 매우 커져갔다

경제적인 면 말고도

 

평민 위주로 모은 징병군도 나름 쓸만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검들고 다치고 돌격하는 발도 돌격보다는

화력 우세가 매우 좋은 교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경찰의 탄생에도 크게 관여했는데

가고시마에 군을 보내면, 사무라이들을 자극할 것 같았기에

프랑스를 참고하여 경찰제도를 만들었고

이는 세이난 전쟁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89년에 메이지 덴노에 의해 사면된다

 

그의 동상은 여러 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사이고와 대립했던 오쿠보 도시미치

전쟁이 끝나고 1년 후에 다른 사무라이들에게 암살당한다

(기오이자카의 변)

 

 

이 시기가 ㅈㄴ 재밌어 보이는데

내가 빅토를 할 줄 모르니

어찌 할 수가 없네

 

빅토3는 좀 쉬워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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