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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전쟁

개성공단 2022. 2. 10. 12:36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프랑스의 식민화

영국이 인도를 발판삼아 주위에 식민지를 형성하면서

프랑스 또한 아시아에 거점을 마련하지 못하면

영국에 뒤쳐질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렇게 19세기 초

프랑스는 선교사를 보내 기독교를 전파하는 동시에

베트남 정부에 개항을 할 것을 여러번 요구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쇄국정책으로 개항 요구를 여러번 거절했고

기독교인 박해가 시작되어 선교사와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한다

그래서 무력으로 방침을 바꿔

프랑스는 1858년 함대를 원정보내

남부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확보

홍강을 따라 베트남 북부를 거쳐

운남으로 이동하여

중국과의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홍강을 지나가는 선박에 엄청난 세금을 거두는

류융푸 흑기군이 큰 장애물 덩어리였다

 

흑기군은 본래 태평천국 산하의 군대였으나

태평천국의 난이 패배로 끝나면서, 그 잔당들이 베트남 북부로 도망쳤고

베트남에 적대하는 토착 부족들을 격파한 공로로

응우옌 왕조의 신임을 얻어 홍강에서 세금 걷을 권리를 얻게 된 

이른바 무장단체였다

 

 

2. 통킹의 충돌

1873년

베트남 원정군 사령관

프란시스 가르니에는 정부의 허가 없이

하노이를 침공하여, 흑기군과 맞섰는데

 

하노이를 점령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전투 중에 창에 찔려 사망해버렸고

이에 프랑스 정부는 원정군을 귀환시켜버린다

1882년

베트남에서 자국 상인들의 불만을 조사하러 온

앙리 리비에르는 상관의 지시를 무시하고

하노이의 요새를 멋대로 습격한다

 

얼마안가 철수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베트남의 종주국이던 청나라에도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청 주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전쟁이 날 것을 우려하고

청나라의 이홍장과 통킹을 양국이 분할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베트남의 의견은 하나도 안들어간다)

야심만만 했던 리비에르는

부레가 청나라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여기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또 멋대로 진격하여

베트남의 남딘을 멋대로 점령한다

(남딘성 전투, 자꾹 전투)

리비에르는 징계를 받아야 했지만

 

때마침,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식민지 확장을 강력히 선호하는 쥘 페리 정권이 들어선다

 

쥘 페리는 리비에르를 몰아주기로 했고

두 번의 패배로 도저히 프랑스군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응우옌 왕조는 흑기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1883년 5월 10일

 

리비에르와 흑기군은 전장에서 격돌했고

의외로 프랑스군은 패배를 당하고

앙리 리비에르는 현장에서 전사하는 결과를 맞고 말았다

(꺼우저이 전투)

 

하지만 리비에르의 죽음은 

쥘 페리 정권의 식민지 확장에 큰 힘을 실어주었고

인도차이나 식민화 정책을 더욱 가속시키게 된다

(리비에르는 영웅적인 죽음으로 추앙받았지만

재조사 한 결과, 그냥 병신같이 싸우다 뒤진걸로 판별난다)

 

3. 청나라와 충돌

프랑스는 통킹에 약 2만명의 군대를 보냈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청나라 또한 병력을 지원 보낸다

 

서로간에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이미 두 나라는 비공식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었으며

곳곳에서 치고 박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4년 5월 11일

프랑스 함장 프랑수아 에르네 푸르니에

청나라의 이홍장 톈진 협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와 청나라의 충돌을 중지하고

즉각 청나라군을 통킹에서 철수시키는 조약이였다

 

다만, 푸르니에는 함장이였지 외교관이 아니였고

언제 철수하는지 명확하게 적어놓으지 않았던터라

(프랑스는 즉각 철수, 청나라는 상황 보고 철수)

 

두 나라간에는 다시 분쟁의 불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1884년 6월 23일

프랑스군은 박레에서 청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양측간의 전투가 곧장 벌어졌고

여기서 프랑스군은 패배하는 곤욕을 치른다

(박레 전투)

프랑스는 청나라가 매복 공격을 하였다고 주장

(그래서 박레 전투를 박레 매복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과와 배상금을 청나라에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이것을 거부한다

 

빡친 프랑스는 푸저우 항구에 포격을 개시했고

푸저우에 있던 청 함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전멸한다

(푸저우 전투/마강해전)

 

그렇게 1884년 8월 23일

청불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초반은 프랑스군이 막강한 화력을 앞세우며

해전이든 육전이든 계속 승승장구해나간다

 

하지만 아편전쟁 패배 이후

청나라가 가만히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였다

청나라는 서방의 장비를 수입하거나

무기고를 건설해 신식 무기를 만들고

서구문물을 계속 도입하려고 애섰으며

(양무운동)

 

수준 면에서는 프랑스군에게 열세라고 해도

물량으로 계속 프랑스군을 가로막으니

어느새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는 북진을 이어나가다

청나라의 악착같은 방어에 진군을 멈추고 말았다

(진남관 전투/방보 전투)

그리고 물자도 거의 다 소모해버려

더 이상의 공세를 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적군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며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린다

(량선 퇴각)

 

하지만 청군의 추격은 없었다

 

 

4. 종전

1885년 3월 30일

자국군이 별 수 없이 퇴각했다는 것과

이제는 뭘 해볼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은

프랑스 의회는 페리 정권을 불신임하기로 했고

쥘 페리는 총리에서 잘린다

육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청나라였으나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는 쿠데타가 터지자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갑신정변)

 

1885년 1월

서태후는 프랑스와 그만 평화를 맺으라고 압박했고

쥘 페리 정권이 무너지자, 평화 회담이 조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1885년 6월

청나라는 베트남을 포기했고

통킹에서 군을 철수시킨다

청나라는 물러났지만

 

류융푸의 흑기군과 근처의 해적들은

통킹을 점령한 프랑스군을 계속 괴롭힌다

 

이들은 1896년이 되서야 겨우 진압된다

역사가들은 청나라가 서양 제국주의에 취약했던 원인은

주로 해군이 매우 약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술한 푸저우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의 기습 한 번에 복건함대가 전멸했고

 

북양함대는 아예 도와주러 오지도 않았는데

일본이 조선을 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것은 변명이였고, 실제로는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기 때문이였다

 

 

 

 

베트남을 잃은 청은 남은 조선에 집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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