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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개성공단 2022. 2. 10. 12:37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조선의 상황

1864년 1월 철종이 후계 없이 사망하고

먼 친척이였던 고종이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고종은 12살의 나이로 어렸기에

그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했고

그는 국가를 위한 일련의 개혁과 고립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국왕의 외척이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터라

대원군은 정치적 인맥이 결여되어 있던 여흥 민씨

여자를 국왕의 며느리이자, 왕비로 선출한다

하지만 왕비는 어느새 자신의 친족들과

대원군의 적을 결집해 정치적 세력으로 끌어모았고

 

1873년 10월, 최익현의 상소를 기점으로

대원군은 국왕이 성인이 되었기에 섭정에서 강제로 축출당한다

 

그리고 고립주의 정책은 포기되었다

1876년 2월 26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운요호 사건)

 

1876년 2월 27일

일본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고, 불평등 조약의 체결을 강요한다

(강화도 조약)

한반도는 일본에게 있어서 전략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이 비문명화된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이 어떤 나라에게 먹혀버린다면?

그리고 그 나라가 우리 일본에 칼을 들이댄다면?

 

대강 이런 생각이였기에

일본의 대조선방침은 소극적으로 조선의 근대화세력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였다

 

 

청나라의 이홍장 또한 일본의 이런 움직임을 파악하고

조선에 중국식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조선에서는 여러 행정, 교육, 군사 부문에서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군사 부분에서 신식 군대가 창설되는 와중에

구식 군대는 버려졌고, 무려 13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다

 

1882년 6월

고종이 민겸호에게 1개월 치의 쌀을 지급하라 명했지만

민겸호는 모래와 겨를 섞은 것을 지급해주었고

이에 항의하는 군인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분노한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민겸호를 비롯한 고위 관료들을 살해했으며

신식 군대의 창설 원인인 일본인들도 표적으로 삼는다

(임오군란)

 

왕비도 표적이 되었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보상금을 요구하며

공사관 경비 명목으로 군대 주둔을 승인받는다

(제물포 조약)

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일시적으로 복귀했으나

 

청나라가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개입했기 때문에

불과 30일도 안 되어 실각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죄를 뒤집어쓰고, 청나라로 끌려간다

 

 

국왕과 왕비는 권력을 되찾았으나

이번엔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고

여기서 위안스카이가 등장한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2. 조선의 위기

1880년대에 이르러 조선은 전혀 개혁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같이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어 나가

조선을 중국의 영향력에서 독립시키키 원하는 개화세력이 있었으나

 

정권의 대부분은 보수적이자 

주요 제도의 개혁 보단, 이전까지의 사회를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부패는 덤으로...

때마침 청군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유로

주둔군을 절반으로 철수 했고

 

1884년 12월 4일

개화당은 일본 공사관에 주둔한 군대의 도움을 받아

연회를 가장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갑신정변)

 

정부를 장악한 개화당은 여러 개혁을 발표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1600명의 군대에 의해

새 정부는 불과 3일천하로 끝나버린다

 

이 사건 이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새 조약을 맺는데

둘 중 하나가 파병하면, 다른 한 쪽도 파병하는 톈진 조약이였다

갑신정변이 대실패하고

그 후, 10년 동안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력에 삼켜져

일본은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었으나

 

1894년

조선 정부의 가혹한 과세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한국사 최대 규모의 농민 반란을 일으킨다

(동학 농민 운동)

 

반란을 통제할 수 없었던

조선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 또한 톈진 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파병을 간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부와 반군 사이에 협상이 체결되어버렸고

(전주화약)

 

청나라와 일본은 당연히 조선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일본은 냅다 경복궁을 점령하고는 

조선에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에 독립 선언을 하고, 자주국을 선포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풍도 해전)

 

 

3. 전쟁

청나라도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전 부문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으나

 

서태후가 자금을 횡령해서 이화원을 짓고

군인들은 아편에서 벗어나오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급여도 받지 못해, 사기는 바닥의 수준이였다

 

최근에 밝혀진 놀라운 사실로

광서제 또한 일본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고

개혁 자체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는게 드러났다

뭐 그런 군대였으니

아산과 평양에서 청군은 일본군에게 탈탈털렸고

 

일본군은 별 저항없이 압록강으로 진격한다

(아산 및 평양 전투)

다음은 해전이였다

 

두 나라 규모는 같아보였지만

청나라에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청나라의 전함 대부분은 노후되어 있었고

전함에 달린 주포는 사거리는 짧고, 관통력도 약했으며

심지어 심각한 탄약 부족 때문에,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

 

청나라가 청나라 한거였고

일본 제국에 큰 승리를 안겨다 준다

(황해 해전/압록강 해전)

일본의 다음 목표는

다롄에 위치한 여순으로

서양에서는 '포트 아서'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대식 장비를 갖춘 요새로

전함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있었고

이 지역을 상실한다면

해군은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은 마침내 이 지역을 함락시킨 동시에

(여순 전투)

 

약 2~6만명의 민간인들이 일본군에 학살당한다

(여순 대학살/포트 아서 대학살)

1895년 2월 12일

산둥의 웨이하이 해군 기지가 함락당하면서

한때 동아시아 최강 함대라고 불렸던

북양함대가 전멸했다

(웨이하이 전투)

 

이홍장의 정치적 힘이였던

북양함대의 전멸은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였는데

 

10년전, 청불전쟁이 벌어졌을 때

남방에 위치한 해군이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홍장은 정치적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그 어떤 군대도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과 똑같은 상황에 청일전쟁에서 재현된 것이였다

 

 

 

4. 여파

청나라는 일본에 협상을 요청했고

 

 

대만, 요동 반도, 펑후 제도를 할양

조선의 자주권 인정, 배상금 지불 등을 담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1895년에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자

 

대만의 중국인들은 타이완 민주국을 세우고

일본 군대에 맞서 저항에 돌입했으나, 실패한다

이젠 하다하다 일본에게 패한

청나라는 세계 열강의 셔틀 수준으로 전락했고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중국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외국인들을 공격하는 짓을 벌인다

 

이것은 점점 심화되어

베이징에서 큰 소란을 벌이게 되는데...

조선은 1894~1896년 동안 갑오개혁을 실시하여

법적으로 노예제도 폐지, 양반의 특권 상실, 귀양 폐지, 조혼 폐지 등

많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진다

 

일본은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제는 러시아가 조선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과연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을까?

 

 

 

빨리 이 겜도 못하는

빅토 시대 넘기고 호이 시대로 넘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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