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소

드레퓌스 사건 본문

기타/역사

드레퓌스 사건

개성공단 2022. 2. 10. 12:38

※ 대충 생략해서 썻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1. 반역자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크게 패했고

 

나폴레옹 3세의 퇴위와 함께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극우 장군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지거나

(1889년 조르주 블랑제 반역 사건)

정치인들이 부패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는 일이 발각되거나

(1892년 파나마 스캔들)

무정부주의자들이 미친듯이 날뛰는 등

(1893년 극악법)

 

제3공화국은 엄청난 사회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불전쟁으로 알자스-로렌이 독일에게 넘어가면서

프랑스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발생했고

 

군 장교들의 대다수는 귀족과 군주주의자로 구성되어 있던 터라

제3공화국을 도무지 마음에 들어하는 이가 없었다

 

 

이 민족주의는 우리 프랑스인이 패배한 이유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기 때문이야! 라는 망상이 생겼고

프랑스와 독일, 양국간에 첩보전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프랑스측 정보국의 수장은 장 상데르라는 중령으로서

 

당시엔 독일로 넘어간 알자스가 고향임과 동시에

반유대주의자였다

1894년

독일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 대령을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무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프랑스군의 정보를 얻고자 했고

 

이를 경계한 프랑스 정보국은 독일 대사관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여성 청소부에게 쓰레기통의 종이 조각들을 구해 올 것을 부탁했으며

 

9월 25일

프랑스군 장교가 기밀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과

독일 대사관에서 엿들은 정보로 유대인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1894년 10월 5일

정보국은 곧 용의자 하나를 추측했고

 

공화주의자, 유대교, 유대계 등

장교들이 싫어하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던

포병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였다

 

 

근데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것은 기밀 정보를 담은 편지였는데

드레퓌스와 필체가 거의 유사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드레퓌스가 용의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건 수사를 맡은 뒤 파티 드클랑 소령은 자칭 필체 전문가가 되어

프랑스의 반역자가 드레퓌스임을 확신했고

 

 

10월 13일, 드레퓌스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어떠한 자백도 하지 않았다

드클랑은 그에게 그냥 자살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할 것이라며 거절한다

이 때 반유대주의 성향의 신문들이 재빨리 이 사건을 기사화했는데

 

거의 소설 수준으로 드레퓌스의 삶을 조작했고

이것은 국민들에게 유대인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12월 19일

재판은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유는 당연히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줄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였고

그것을 대중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였다

 

 

다음으로 4명의 배심원들이 필적 감정을 시작했는데

2명은 판정 불능, 1명은 드레퓌스의 것이 아님

나머지 1명이였던 알퐁소 베르티옹은 드레퓌스의 것이 맞다고 주장했고

(근데 알퐁소 베르티옹은 필체가 아니라 사진 전문가였다)

 

 

기타) 알퐁소 베르티옹은 머그샷을 표준화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범죄자의 사진을 찍고, 그들의 얼굴과 행동들을 분석함으로써

미리 범죄자를 예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 증거로 슈바르츠코펜이 보낸 편지에서

D라는 이니셜을 발견했고, 이것이 드레퓌스의 D이라고 주장했으며

 

12월 22일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1895년 1월 5일

 

드레퓌스는 굴욕적이게도

파리 군사학교의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휘장, 재킷, 몇몇 장식들을 찢어야 했으며

 

4월 14일

프랑스령 기아나, 악마의 섬으로 유배

4평 남짓한 감옥에서 지옥의 생활을 보내야 했고

 

9월 16일

영국 신문이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날조하는 바람에

두 발목에는 족쇄가 차야 했다

 

 

그렇게 드레퓌스는 절망에 쌓인 채, 이 섬에서 죽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2. 진실을 향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친형인 마티 드레퓌스

협박 및 체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재심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평범한 민간인이였던

그로서는 마땅한 증거를 찾기는 힘들었다

1895년 7월

장 상데르의 후임으로 조르주 피카르가 정보국에 임명되는데

드레퓌스 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하던 와중에

 

드레퓌스의 반역 혐의에 대한 증거가 조작되었고

이 사건의 진범이 페르디낭 에스타라지임을 깨닫는다

피카르는 이 사실을 윗선에 보고했지만

드레퓌스의 누명은 이 윗선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무시당했고, 이에 피카르는 언론에 이 사실을 제보한다

 

 

1897년 11월까지 에밀 졸라를 비롯한 많은 저명인사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운동을 시작했고

 

에스테라지에 대한 재판이 막을 올렸다

1898년 1월 재판이 행해졌지만

많은 저명인사가 원한 민사 및 공개 재판은 거절되었고

 

예전과 같이 짜고 치는 재판이 있을 뿐이였다

 

세 명의 필적 전문가는 에스테라지의 것이 아님을 주장했고

에스테라지가 입을 열 때마다, 박수 갈채가 들렸다

 

반면, 드레퓌스의 변호인단 및 증인들은 야유를 받았으며

재심의 계기를 제공한 피카르는 기밀 유출 혐의로 좌천당한다

 

 

 

에스테라지에겐 결국 무죄가 선고되었고

그 즉시 드레퓌스 재심파과 유대인을 향한 대규모 폭동이 벌어진다

에스테라지는 다음에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1898년 9월에 뉴욕의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자신이 간첩 행위를 한 것이 맞다며 자백을 한다

 

그리고 1920년에 런던에서 사망

1898년 1월 13일

 

에스터하지의 무죄 판결에

에밀 졸라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올렸는데

이것은 프랑스 고위층에 대한 모두까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졸라는 명예훼손으로 기소당하고

법정최고형인 징역 1년,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재판을 둘러싼 폭력적인 청중을 의식한 탓이였다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진짜로 간첩질을 한 에스터하지는 무죄 판결을 받고

진실을 폭로한 피카르와 졸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가장 억울하고 무고하게 감옥에 잡혀 있는 드레퓌스의 존재

 

이 세가지 점 때문에

프랑스는 공화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국가로 인식되었고

국내에서는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

1898년 8월

피카르의 후임으로 카베냐크 장군이 왔는데

 

그는 이제까지의 재판과 자백을 통해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고

반대파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그의 조수와 조사를 시작했는데

 

깊이 파고든 결과, 오히려 드레퓌스의 증거가 조작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범인은 파리에서 방첩 임무로 활동하던 앙리 중령으로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를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나

카베냐크 장군의 심문에 모든 죄를 시인했고

8월 31일, 군사 감옥에서 면도칼로 목을 그어 생을 마감한다

 

 

다만, 그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 당했다는 의견이 있다

감방을 수색했을 때, 면도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정부는 그의 심정과 행동에 비추어 볼 때, 자살로 판정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서 뜨거운 감자로 타올랐고

 

1898년의 총선에서는 좌파가 제2당으로 떠오르기까지 한다

 

극우파들은 전국에서 폭동을 벌였으며

 

어떤 장교는 아예 쿠데타를 시도하기까지 하는 등

프랑스는 개막장으로 치달은다

(하지만 군인들이 호응안해줘서 실패)

 

 

1899년 6월 3일

상원은 엄숙한 분위기의 청문회를 진행한 끝에

드레퓌스의 이적행위는 조작되었다고 판단하고

1894년의 판결을 파기, 재심을 다시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3. 사건의 끝

드레퓌스는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그를 위해 벌어진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는 6월 9일 섬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고

 

7월 7일, 5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다시 법정에 섰다

1899년 9월 9일

대법원은 다시 판결을 내리는데

드레퓌스의 반역죄는 여전히 유죄인 반면에

정상 참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징역 10년을 내린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일단 드레퓌스는 前 군인 신분이였고

그에 맞춰 군사 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였다

이 판결에 국내외에선 많은 항의가 쏟아졌고

 

여론에 밀린 군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에

바로 석방하는 거래를 제안했다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는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수감 생활을 지속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고

마지못해 프랑스군의 제안을 수락하여 석방된다

드레퓌스의 거래 승낙에 대한 반응은 대략 냉담했는데

 

 

그의 석방에 축하를 보낸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심파들은 드레퓌스 한 사람의 '석방'을 위해 움직인게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그의 '무죄'를 인정하고

그들의 모순된 행위들을 고쳐나가기 위함이였기 때문이였다

 

 

재심파들은 드레퓌스를 비난했지만

이제 뭐 어쩌겠는가? 다 끝났는데...?

1902년

 

제2세력이였던 좌파가 대승리를 거뒀고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3년에 걸친 수사 끝에, 8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진범은 에스터하지이며, 군의 위신을 위해 많은 증거가 조작되었음을 시인한다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1899년의 군사 재판의 판결을 취소하고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와 그를 복권시킬 것을 명령한다

 

 

이렇게 12년 동안

프랑스 제3공화국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던

최대의 정치적 스캔들, 드레퓌스 사건이 해결되었다

 

 

4. 그 후

드레퓌스는 다시 포병 부대의 장교가 되었지만

오랜 수감 생활로 얻은 병은 그를 괴롭혔고

1907년 10월에 48세의 나이로 전역한다

 

 

1908년에는 반유대주의 성향의 사람에게 암살의 위협을 겪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포병 예비군 장교로서 전장에 섰고

1919년 7월 19일에 중령으로 군 계급을 마친다

 

그는 그를 위해 힘썼던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1935년 7월 12일

스위스에서 수술을 받고 파리로 다시 돌아오던 중

75세의 나이로 침대 위에서 사망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정치적인 변화도 이루었는데

 

 

민족주의자 및 반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력은

그 동안 흩어져 있던 공화주의자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은 1940년까지 권위주의와 대중주의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공화국의 모순된 점을 발견한 좌파 세력은

사회주의를 급부상시켜 프랑스 사회당을 창설한다

이후에도 공화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1940년에는 프랑스가 두 개로 나눠지는 것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사건이 끝난지 100년이 넘었지만

 

2022년 지금도 극우파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고 있다 한다

 

 

 

연재글 오랜만에 쓰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기타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스페인 전쟁  (0) 2022.02.10
청일전쟁  (0) 2022.02.10
청불전쟁  (0) 2022.02.10
아프리카 쟁탈전  (0) 2022.02.10
세이난 전쟁  (0) 2022.02.10
Comments